전 연인 집 앞에 '조용히' 경고문 걸어뒀어도…法 "주거침입"

중앙일보

입력

서울 다세대주택 전경. [연합뉴스]

서울 다세대주택 전경. [연합뉴스]

“공동현관이 항상 열려 있어 그냥 들어갔습니다.”
A씨는 전 연인의 주거에 3차례 침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전 연인은 10세대 규모의 전형적인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공동현관문 잠금장치가 따로 있지 않았고 경비원도 없었다.

A씨는 매번 그렇게 밤 늦은 시간에도 주택에 들어가 계단을 통해 2층에 있는 전 연인 현관문 앞까지 갔다. 집 안에서 나는 소리를 녹음하거나, ‘게임은 시작되었다’고 쓰인 마스크를 걸어두거나, 피해자가 다른 남자와 찍은 사진을 놓아뒀다.

주거침입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A씨는 “잠금장치나 보안장치 없는 주택에 들어가 계단이나 복도에 있다 조용히 나온 것 뿐이며 피해자 집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고 항변했다. 주거침입죄에서 말하는 피해자의 ‘사실상 평온’이 깨진 게 아니란 것이다.

이런 주장은 1심 판사에겐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벌금 500만원 선고, 지난해 4월) 항소심에서는 받아들여졌다(무죄, 지난해 9월). 서울북부지법 형사항소1-2부(부장 한성진·남선미·이재은)는 A씨의 행동이 ‘사실상 평온’을 해치지 않았으므로 주거침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우선 공동현관이 잠겨 있지도,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으며 주차장 CCTV는 작동되지도 않는 빌라 건물은 “외형적으로 외부인의 무단출입을 통제·관리하고 있는 사정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봤다. 그리고 A씨가 현관문을 열려 하거나 두드리진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도 당시 그가 문 앞까지 온 줄도 몰랐기 때문에, 평온이 깨진 건 아니란 결론이다.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이런 판단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A씨를 주거침입죄로 처벌해야 된다고 보고 지난달 15일 판결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우선 출입통제가 엄격하지 않은 빌라라고 해도 외부인이 무단출입해도 된단 얘긴 아니라고 봤다. “다세대주택의 공동현관, 공용계단, 세대별 현관문 앞부분은 거주자들의 주거 공간으로 상가와 비교해 사생활 및 주거 평온 보호 필요성이 큰 곳이므로 외부인 출입이 일반적으로 허용된다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작동하지 않는 CCTV라 해도 그것이 설치돼있다는 사실이나 ‘CCTV 작동 중’ ‘외부차량 주차금지’라는 문구만 봐도 해당 건물에 대한 외부인의 무단출입을 통제·관리한다는 취지를 표시한 거라고 봤다.

대법원은 그 당시에 피해자가 알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문 앞에 놓인 것들을 보고 공포감을 느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A씨와 피해자가 헤어진 연인 사이이고, A씨가 그 즈음에 피해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욕설이나 성희롱을 한 사정도 살폈다. 대법원은 “거주자의 의사에 반한다는 사정만으로 바로 침입에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지를 평가할 때 고려할 하나의 요소”라면서 “A씨와 피해자의 관계, A씨의 출입 경위와 출입 시간, 사건 전후 A씨의 행동, 피해자의 의사와 행동, 주거침입에 대한 사회통념 등을 고려해 보면 A씨는 피해자의 ’사실상 평온’을 해쳤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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