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美 '北비핵화 중간단계' 언급에, 정부 "尹 담대한 구상과 같은 취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백악관 고위 당국자가 북한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제안한 '중간 단계 조치'(interim steps)에 대해 외교부가 "윤석열 정부의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과 동일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백악관은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가치 있는 대화를 모색하겠다"는 입장을 추가로 밝혔다.

미국은 적극적 대화 의지를 다시 보이면서도 중간 단계 조치 제안이 자칫 북핵을 용인하는 '스몰 딜'로 인식되지 않도록 선을 긋고, 정부는 한·미 간 대북 접근법에 균열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 않게 메시지 관리에 나선 모양새다.

'중앙일보-CSIS 포럼 2024'가 4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렸다. 이날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화상으로 특별담화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중앙일보-CSIS 포럼 2024'가 4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렸다. 이날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화상으로 특별담화를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美 중간 단계-韓 담대한 구상 "동일 취지"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5일 정례브리핑에서 전날 백악관 관계자의 '중간 단계' 관련 언급에 대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한·미 양국 정부의 공통된 목표"라며 "북한 정권의 핵 프로그램 완전 폐기 의지가 확인된다면 이를 이행하는 조치들이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임 대변인은 이어 "정부의 담대한 구상과 미국 측 관계자의 언급은 동일한 취지"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담대한 구상은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비핵화 조치에 나설 경우 협상 초기에 남북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가동한다는 게 골자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정례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이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정례 브리핑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앞서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지난 4일 '중앙일보-CSIS 포럼 2024'에서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며 "그러나 만약 전 세계 지역을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단계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특히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위협 감소(threat reduction)를 위해 북한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다.

4일 '중앙일보-CSIS 포럼'에서 화상으로 특별 담화를 하는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 김종호 기자.

4일 '중앙일보-CSIS 포럼'에서 화상으로 특별 담화를 하는 미라 랩-후퍼 미 백악관 NSC 겸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 김종호 기자.

"비핵화로 가는 동안 대화 모색"

이와 관련, 백악관은 추가 설명도 내놨다. 4일(현지시간) 미 NSC 대변인은 중앙일보의 관련 질의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며 "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동안(while we work towards) 북한과 가치 있는 여러 대화를 모색할 것이며, 이는 한반도에서 우발적인(inadvertent) 군사적 충돌의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NSC가 '비핵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을 부각한 건 중간 단계 조치의 필요성을 재차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백악관의 '중간 단계' 구상은 결국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와 이에 따른 한·미의 상응 조치로 요약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사실 협상의 진전에 따라 단계적으로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전통적인 비핵화 협상의 원칙이라 새로운 제안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원론적 대화 의지만 표명해 '전략적 인내 2.0'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바이든 행정부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내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중간 단계 조치는 핵 동결에 보상을 제공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스몰 딜이나 잠정 합의(interim agreement)로 인식되곤 한다. 백악관이 이틀 연속 "최종 목표는 완전한 비핵화"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종 목표를 비핵화로 설정하지 않는 '위협 감축 논의'는 자칫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군축 협상'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일은 없다는 메시지 발신인 셈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정부가 중간 단계 조치에 대해 '초기 조치' → '실질적 비핵화' → '완전한 비핵화'의 3단계로 구성된 담대한 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공식 입장을 낸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담대한 구상은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협상에 나서는 즉시 한반도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과 북한 민생 개선 시범 사업을 가동하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전제는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인데, 미국의 중간 단계 제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라는 점을 강조해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하는 한·미의 대북 접근법에 차이는 없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공은 北에…반응 주목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첫해인 2021년 5월 대북 정책 리뷰(검토)를 마친 뒤 북한에 '전제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했고 이후 이렇다 할 대북 제안을 한 적이 없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려 있던 북한 문제에 대해 백악관이 중간 단계를 처음 언급하자, 이제 관심은 북한의 반응에 쏠리고 있다.

북한은 최근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는 일부 소통을 재개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미국 대선을 염두에 두고 몸값을 올리기 위해 조만간 '판 흔들기'용 호응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중요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중요 군수공장을 현지지도하는 모습. 조선중앙TV. 연합뉴스.

그러나 실질적인 대화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북한은 이미 스스로 핵보유국으로 규정하고, 비핵화는 대화 의제로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4년째 아무런 대화 없이 얼어있는 북·미 관계에 균열(crack)을 내 볼 용의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며 "그러나 막상 미 대선 전까지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