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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사실 아니라 심리전 조작"...베트남 참전자들, '양민 학살' 강력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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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서 파병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에 대해, 참전자들을 중심으로 “검증된 사실이 아니며, 베트남 스스로도 전혀 거론하고 있지 않은 일이며, 국익을 해치는 주장”이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KIMAㆍ원장 김형철)은 국민의힘 국가안보위원회(위원장 성일종 위원)와 함께 5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연 ‘한국군 베트남전 파병 60주년: 회고와 전망’이란 세미나에서다. 이날 세미나는 지난해 2월 7일 법원이 베트남 국적자가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학살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데 대해 군 관련 인사들이 반발하며 마련한 자리였다.

1966년 백마부대(육군 9사단) 환송식 풍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66년 백마부대(육군 9사단) 환송식 풍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태우 KIMA 핵안보연구실장은 “한국ㆍ베트남 간 교류에서 전쟁 중 양국 간 살상에 대한 유감을 표명할 때마다 베트남 측은 정중하게 사과를 만류하며 양국관계 발전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답변해왔다”며 “전쟁 중 발생하는 민간인 희생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은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국제적 관례이며, 피해자에 대한 보살핌은 자국 정부가 맡았다”고 설명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도 “베트남이 가장 높은 단계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나라는 단 5개국뿐이며 여기엔 과거 적국이었던 한국과 미국이 포함돼 있다”면서 ‘국익 앞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다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강조했다

강상구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음해대응추진위원은 “음해세력들이 파월 한국군이 130건(마을) 1만여 명을 대량학살했다고 주장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면서 “이는 허위 사실에 기댄 주장”이라고 밝혔다. 강상구 위원은 그러면서 1968년 10월 14일 린선사 승려 살해사건의 경우 베트콩의 자백으로 심리전 조작으로 드러났고, 1965년 12월 22일 턴지앙촌 학살 사건은 파월 한국군의 전술 책임 지역 밖에서 일어난 사실을 제시했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원장 김형철)은 국민의힘 국가안보위원회(위원장 성일종 위원)와 함께 5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한국군 베트남전 파병 60주년: 회고와 전망’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한국군사문제연구원(원장 김형철)은 국민의힘 국가안보위원회(위원장 성일종 위원)와 함께 5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한국군 베트남전 파병 60주년: 회고와 전망’ 세미나를 열었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박인환 변호사(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1심 재판부는 국방부의 『파월한국군전사』와 미국의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등 공식기록에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명시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베트남 전쟁 때 베트콩은 군복이 아닌 민간 복장을 입고 전투행위를 한 뒤 마을 속에 사라지는 수법을 썼다. 양민으로 위장하거나, 노약자나 부녀자를 앞세워 기습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베트콩의 교전법규 위반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생긴 것이지, 한국군이 학살한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육군 2개 사단(수도사단, 9사단), 해병 1개 여단(2여단) 등 전투부대를 중심으로 최대 5만여명을 월남에 파병했다. 9년간 파병 인원은 34만 6393명이었다. 이 중 5099명(전사 4663명, 순직 275명, 사망 161명)이 숨졌으며, 1만962명(전상 8380명, 부상 2582명)이 다쳤다. 실종은 4명이었다.

지난해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베트남전 참전 용사와 유가족들이 베트남전 전사자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베트남전 참전 용사와 유가족들이 베트남전 전사자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채명신 당시 주월사령부 사령관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제일 첫째로 내렸다. 주월 한국군은 중대 전술기지로 지역을 방어하는 전술을 채택했으며, 일부 ‘양민 학살’ 주장에서 나타나는 대규모 소탕 작전을 시행할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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