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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재승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재등장 신호…동맹 외교의 골든타임을 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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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불확실성 커지는 국제 정세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미국 대선 투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차기 미국 행정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국제 정세의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달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 경선 유세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그는 분담금을 다 내지 않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에 대해선 미국이 보호하지 않고 러시아가 마음대로 하도록 격려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은 힘을 과시하면서 현상 유지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한 다소 과장된 수사법일 순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우방을 경시하는 기조는 벌써 외교가에 파문을 불러오고 있다. ‘트럼프주의’ 외교정책은 유럽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들이 더는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으며 미국이 동맹국들에 이용당한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미국 하원에선 950억 달러 규모의 대외 안보 지원 패키지가 발이 묶여 있다.

서방 빈틈을 파고드는 중국·러시아…개별 국가 차원 대응 어려워
한국, 안보·경제적 이익 담보하기 위한 국제적 네트워킹 힘써야
올여름 워싱턴 나토 정상회담은 한국 동맹 자산 공고화 분수령
동맹과 비동맹 양자택일 함정 빠지지 말아야…플러스 알파 전략 필요

전쟁 발발 2년, 서방 결속력 시험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예비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오른쪽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예비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오른쪽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며 영토 점령을 고착화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한 6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은 미뤄졌다. 얼마 전 유럽연합(EU)과 이탈리아·캐나다·벨기에 정상들은 전쟁 발발 2년을 맞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공항에 모였다. 이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어딘지 어두운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장기적 소모전으로 흘러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의 결속력을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렸다.

에스토니아의 카야 칼라스 총리는 옛 소련 시절에 건설한 기념물 철거를 주장했다가 러시아의 공개 수배 명단에 올랐다. 역사적 기억을 모욕하고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행동했다는 이유다. 에스토니아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해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는 나라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구조가 균열의 틈을 보이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과 이란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합의 축이 파고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의 보수 언론인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에서 전쟁 장기화의 책임을 미국으로 돌렸다. 그는 공공연하게 트럼프 진영을 옹호하며 미국의 분열을 유도했다. 불간섭주의와 실리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계 국가들은 서방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서방의 이중잣대를 비난한다.

떠오르는 트럼프에게 흔들리는 나토

2024년의 국제 정세는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무질서한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지난 1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약해졌고 권위주의의 도전은 거세지고 있다. 자유와 인권과 같은 보편적 규범을 지키지 않는 쪽을 제재할 의지와 힘을 잃어버린다면 국제질서는 비대칭적인 다극화로 이행할 수도 있다. 다자간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세계 경제가 블록화로 재편되는 걸 막을 수 없다.

동맹 외교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집단방위 조항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트럼프의 언사에 나토가 흔들린다. 언제든 미군 철수 검토 카드를 받을지 모르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트럼프주의가 득세하고 미국 주도의 글로벌 동맹이 한계에 부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비롯한 동맹 우선의 기조에서 한발 물러나야 할까.

한국에 이론적 중립 옵션은 없어

한국·미국·일본의 협력 수준을 낮추고 중국·러시아·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한반도 안보 상황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근시안적 오류에 가깝다. 오히려 동맹에서 후퇴하면 장기적으로 한국 외교의 레버리지를 약화할 위험이 더 크다. 전선 국가인 한국은 실용뿐 아니라 국제적 차원의 원칙이 아직 절실히 필요하다. 핵 억지를 포함한 안보의 핵심 이익이 존재하는 한 이론적인 중립의 옵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에선 동맹에 지나치게 몰입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이는 중국·러시아·북한 및 제3세계와의 대화와 교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지 동맹의 온도를 낮춰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양자택일로 진영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동맹 체제를 기반으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동맹외교는 아직 완전한 궤도에 오른 게 아니다.

한·미 동맹의 신뢰도는 핵협의그룹(NCG) 설립을 비롯해 지난 2년간 많이 회복했다. 한·일 관계의 개선과 한·미·일 협력 구도는 한국이 인도·태평양이나 유럽 우방국들과 양자 또는 다자 차원에서 새로운 연계를 용이하게 구축할 플랫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속한 ‘리그’를 확실히 해야

미국이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돌입하기 직전인 올해 상반기가 한국으로선 동맹 자산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한·미 양자 관계뿐이 아니다. 한·미·일 협력 관계와 함께 나토+아시아·태평양 4개국(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의 파트너십을 포괄한다.

동맹 체제의 공고화는 차기 미국 행정부의 성격에 상관없이 중요하다. 만약 바이든 행정부 2기가 출범한다면 한국이 보다 능동적으로 국제 질서와 규범 형성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만약 트럼프 체제가 들어선다면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국제 질서 변화에서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우방과의 연계를 다시 수립할 수 있는 복원점이 될 것이다. 올여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담은 이런 동맹 체제 논의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동맹 외교의 공고화에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안이 있다. 첫째, 한국이 속할 수 있는 ‘리그’를 확실히 해야 한다. 국제 질서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려면 어떤 집단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은 아직 주요 7개국(G7)에 정식으로 가입한 게 아니다. 한국이 속한 주요 20개국(G20) 회의는 내부적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데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동아시아에선 유럽처럼 지역 차원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나 언어를 공유하는 권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되돌아보면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리그가 부족하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안보와 경제의 차원에서 한국이 적극적으로 팀을 만들어 참여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소다자주의를 포함한 외교적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민간 역할 강화한 병진 노선 필요

둘째, 동맹에 공고히 참여하는 동시에 원조와 지원에 대한 보상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동맹도 거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혜택을 받는 수직적 동맹 관계만 볼 게 아니다. 수평적 차원의 파트너십 체제를 염두에 두고 일본·호주·영국·독일 등 주요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몸집과 위상이 커졌다. 그만큼 국제 사회의 요구를 더 많이 받을 것이다. 학생에 비유하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숙제는 늘어나고 시험은 어려워지는 것과 같다.

한반도를 벗어난 국제 문제에서도 이제는 내향적 거부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가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도 필요한 걸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대신 한국이 원하는 보상과 거래 조건을 국익 차원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여기엔 군사·안보뿐 아니라 산업·기술,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한 기후동맹 같은 요소도 세밀하게 포함해야 한다.

셋째,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를 포함한 신흥시장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동맹 체제를 약화하면서 균형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범 동맹 체제의 공고화를 기반으로 협상력과 흡입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아쉬웠던 결과를 그냥 묻어둘 게 아니라 축적한 네트워킹을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 물론 모든 국가와 동시에 관계를 개선하는 건 물리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전략국가군 선정을 선행해야 한다.

넷째, 한국의 동맹 외교 논의를 기업 등 민간 차원에서 병행해야 한다. 최고 지도자와 정부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다. 세밀한 부분은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기업과 학계 등 전문가 집단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나설 필요가 있다.

공급망 재편과 다각화, 첨단산업 경쟁 심화 등을 고려하면 국익을 정의하는 건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대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는 민·관 공조체제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복잡하게 엮이는 안보·경제적 이해관계를 추려 내고 새로운 규범 창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