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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배상 판결…피해자 이미 숨졌지만 아무도 몰랐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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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지난 1월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월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법적 근거 없이 원고들을 수용한 사실이 증명된다. 국가는 이들의 손해에 배상할 책임이 있다.”

부산지법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70명이 국가와 부산시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60억여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지난달 7일 선고하며 이같이 밝혔다. 형제복지원은 1960~ 1980년대 내무부 훈령 410조에 따라 ‘부랑자 선도’를 명목으로 부산에서 운영된 수용 시설이다. 부랑자는 물론 일반 시민 등 3만8000여명이 수용됐고, 가혹한 강제 노역과 폭행에 650여명이 숨졌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A씨도 이날 승소한 원고 중 한 명이다. 1950년생인 그는 1975년 6월부터 28개월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점을 인정받았다. 법원은 위자료 2억원 배상을 판결했다. 그는 형제복지원에서 당한 가혹 행위로 평생 후유증을 겪었다. 삶도 망가졌다.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로 서울 용산구에서 홀로 살았다.

하지만 A씨는 이 배상금을 받을 수 없게 됐다.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는 관할 경찰 등을 통해 A씨 사망 사실을 최근 확인했다. 협의회는 “A씨는 지난해 5월 소송을 제기한 뒤 2개월쯤 뒤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무연고 사망 처리됐다”고 밝혔다. 돌보는 이가 없고 평소 연락도 잘 닿지 않아 그가 사망한 사실을 모른 채 재판이 진행됐다고 한다.

불법 수용과 위자료를 인정받았지만, 당사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셈이다. 이런 경우 민법에 따라 A씨의 직계 비·존속이나 배우자, 4촌 이내 방계 혈족 등이 상속인이 될 수 있다. 상속인이 없으면 법원 등이 선임한 재산관리인이나, A씨를 돌본 ‘특별연고자’ 등에게 A씨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줄 수 있다. 모두 여의치 않으면 A씨 재산은 국가에 귀속된다.

A씨 사례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사건은 2018년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이 비상상고를 통해 박인근 형제복지원 전 원장의 특수감금 무죄 판결을 파기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수십 년 만에 새롭게 조명됐다. 대법원은 이 비상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헌법 최고 가치인 인간 존엄성이 침해됐다”며 피해자·유가족의 명예 회복 등을 위한 정부 조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수용자들의 처지를 당장 개선해주진 못하고 있다. 박경보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 대표는 “대부분 피해자는 트라우마와 신체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며 “외부와 교류하지 않고 홀로 사는 고령자도 많다. 아무도 모르게 형제복지원에 갇혔던 피해자들이 이제는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상황”이라고 했다. 박 대표도 1975년 11살 나이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53개월간 수용됐다. 그도 이번 재판에서 승소했다.

박 대표는 법무부와 부산시가 1심 결과에 항소한 데 대해서는 “피해자 존엄을 회복해달라는 대법원 당부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승소한 이들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피해자로 ‘인증’된 이들이다. 항소심 결과도 비슷하겠지만, 그동안 A씨 같은 불행은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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