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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으로 출발한 솔올미술관, 강릉 '문화력' 시험대에 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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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개관한 솔올미술관. 마이어 파트너스에서 설계를 맡았다. [사진 솔올미술관]

2월 14일 개관한 솔올미술관. 마이어 파트너스에서 설계를 맡았다. [사진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2층에서 내다보이는 강릉 시내 풍경. [사진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2층에서 내다보이는 강릉 시내 풍경. [사진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의 설치 작품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 [사진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의 설치 작품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 [사진 솔올미술관]

미국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89)와 이탈리아 미술가 루치오 폰타나(1899~1968). 건축과 미술에 한 획을 그은 두 해외 거장이 국내 예술 애호가들을 지금 강릉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달 14일 개관한 강릉의 새로운 공공미술관 '솔올미술관'. 지난 3·1절 연휴에 3000여 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고 개관일부터 지금까지 3주 동안 약 1만 2000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새 미술관의 화려한 출발이다.

5월부터 열릴 다음 전시도 눈길을 끈다. 캐나다 태생의 미국 추상 표현주의 작가 아그네스 마틴(1912~2004)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그런데 계획은 여기까지다. 두 번째 전시 이후 앞으로 미술관을 운영할 주체인 강릉시가 공식적으로 밝힌 전시와 운영 계획이 아직 없다. 지금 미술계에서 이곳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지금 미술계에서 관심이 뜨거운 솔올미술관을 리처드 마이어, 루치오 폰타나, 그리고 기부채납 3가지 키워드로 들여다본다.

리처드 마이어, '백색의 미술관'

솔올미술관 후면 모습.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솔올미술관 후면 모습.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 미술관은 강릉 교동7공원에 지상 2층, 지하 1층, 연면적 3천220㎡ 규모로 지어졌다. 구불구불한 언덕을 올라 미술관 현관 앞에 이르면 먼저 강릉 시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미술관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 마이어가 설립한 건축회사 마이어 파트너스가 설계했다는 점에서 개관 전부터 주목받았다. '백색 건축'으로 유명한 마이어는 1984년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 센터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등을 설계했고, 국내에선 강릉 씨마크 호텔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업에서 은퇴한 마이어는 이번 미술관 설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와 유리, 직선 등으로 구성된 건물은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했다. 미술관 개관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연덕호 마이어 파트너스 대표는 "고요하면서도 건물 그 자체로 완벽한 조형인 동시에 예술 작품과 상호작용하게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솔올미술관은 마이어 파트너스가 세계 여러 도시에 지어온 미술관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강릉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곳엔 '건축 덕후'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먼저 찾고 있다. 지난달 19일 이곳에서 만난 한 직장인(용인시 거주)은 "마이어가 설계했다고 해서 개관을 기다려왔다. 단순한 재료와 구성으로 투명하게 보이는 건물과 자연의 조화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캔버스 찢은 거장, 폰타나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Concetto spaziale, Attese), 1964, 캔버스에 수성 페인트, 베기, 81 x 100 cm. 루치오 폰타나 재단, [사진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 '공간 개념, 기다림'(Concetto spaziale, Attese), 1964, 캔버스에 수성 페인트, 베기, 81 x 100 cm. 루치오 폰타나 재단, [사진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곽인식 전시에 출품된 '작품 63-G'. 유족 소장. 사진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곽인식 전시에 출품된 '작품 63-G'. 유족 소장. 사진 솔올미술관

개관 전시는 '공간주의 미술'로 유명한 폰타나 개인전 '루치오 폰타나:공간·기다림'(4월 14일까지)이다. 폰타나는 전통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캔버스에 구멍을 내거나 칼자국을 내며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9월 프리즈 서울에도 붉은색 캔버스의 한가운데를 세로로 칼자국을 낸 그의 작품 '마졸레니'(1964~1965)가 100억 원대로 출품돼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번 전시는 국내 미술관에서 처음 열리는 폰타나 개인전으로, 재단 소장품으로 꾸며졌다. 이번 전시에선 그가 현실의 물리적 공간을 작품의 미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며 선보인 회화와 조각 작품을 두루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미술관 로비 천장에 매달린 설치 작품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다. 이 네온은 절제미가 돋보이는 로비 공간 위를 자유롭게 가로지른 백색 선으로 미술관 공간에 '화룡점정(畵龍點睛)' 역할을 하며,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혁신적인 작품 세계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또 다른 전시장에선 1930년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 한국인 미술가 곽인식(1919~1988) 전시도 열리고 있다. 이곳에선 자신의 고유한 미술 언어를 찾기 위해 일찍이 철 구슬로 유리판을 깨뜨리거나 동판을 찢고 봉합하는 실험을 했던 그의 작품 20점을 소개한다.

'기부채납' 그 이후?  

 루치오 폰타나의 '붉은 빛의 공간 환경', 1967년 작품을 솔올미술관에 재현했다. [사진 솔올미술관]

루치오 폰타나의 '붉은 빛의 공간 환경', 1967년 작품을 솔올미술관에 재현했다. [사진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은 건축과 전시로 화려하게 그 존재감을 알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구체적으로 그려진 미래 청사진이 없다. '기부채납'이라는 미술관의 독특한 태생이 영향을 미쳤다. 소유권을 받아 앞으로 운영해나갈 시의 안이한 행정도 한 몫했다. 지금까지 미술관을 설계하고, 짓고, 전시를 마련한 주체는 바로 인근에 아파트를 개발하고 있는 시행사(교동파크홀딩스)였다. 이 회사는 강릉시 소유 부지에 아파트를 지으며 그 옆에 미술관과 함께 공원을 조성해 시에 기부채납키로 했다. 시행사 위탁을 받아 개관과 전시를 준비해온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의 임무는 오는 8월 계약이 종료된다. 문제는 그 이후다.

강릉시 관계자는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행사는 앞으로 미술관 수장고 공사와 전반적인 보수를 마쳐야 한다. 오는 11월경 시가 소유권을 넘겨 받고, 이르면 내년부터 시립미술관 형태로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오는 7월 이후 학예 연구사와 큐레이터 등 10명 내외로 조직을 구성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전시 예산도 솔올미술관 10억원을 비롯해 시의 전체 전시 예산 30억원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말 그대로 윤곽만 있는 상태다.

그러나 폰타나 개인전과 같은 굵직한 미술품 전시의 경우 1~2년 앞서 기획을 추진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준비가 늦은 셈이다. 3년간 개관을 준비해온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은 "명품 미술관 하나가 한 도시뿐만 아니라 국가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생각으로 개관을 준비했다"며 "그러나 앞으로 운영을 이어갈 시의 준비팀과 그 과정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한 게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내년에 솔올미술관은 어떤 전시로 관람객을 맞을까. 강릉의 문화력이 지금 큰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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