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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시각각

의대 증원의 ‘블루 스폿’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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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최현철 논설위원

바둑에서 특정 위치에 결국 같은 색의 돌이 놓일 자리라도 놓는 순서가 중요하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에 늘 정확한 순서대로만 놓을 순 없지만, 수순(手順)을 무시하면 낭패를 본다.
 요즘 바둑 해설엔 AI가 필수다. 반상에 돌이 놓일 때마다 이후 가능한 여러 수를 보여주고, 그 수가 놓일 경우 승률까지 예측한다. 이 중 승률이 가장 높은 점은 파랗게 표시된다. 그래서 ‘블루 스폿’이라고 한다. 끝내기 6연승으로 올해 농심배를 품은 신진서는 블루 스폿을 가장 잘 찾아내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신공지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 해설가는 “신진서는 정확한 수순을 따라가고, 상대는 조금씩 승률이 떨어지는 지점에 돌을 놓다 보면 늘 중반 이후 예상 승률이 75% 정도로 벌어진다”고 평했다. 이번 농심배에서도 최종전 직전까지 다섯 번을 그렇게 뒀다. 최종국에선 중반에 실수해 판세가 갑자기 뒤집히기도 했지만, 상대 역시 수순을 그르치며 결국 2005년 이창호 이후 20년 만에 상하이 대첩을 재현했다.

프로기사 신진서(23) 9단이 2월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25) 9단에게 249수 만에 불계승했다.   이로써 신진서는 농심배 사상 초유의 '끝내기 6연승'을 질주하며 한국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연합뉴스

프로기사 신진서(23) 9단이 2월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25) 9단에게 249수 만에 불계승했다. 이로써 신진서는 농심배 사상 초유의 '끝내기 6연승'을 질주하며 한국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연합뉴스

 바둑뿐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도 그렇고, 갈등이 불가피한 정책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고, 욕심난다고 불쑥 돌을 놓아선 엉뚱한 곳에서 대마가 잡히거나 집을 빼앗겨 패한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의사 간 갈등이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애초 분위기는 정부에 유리했다. 응급실 뺑뺑이, 의사를 찾지 못하는 지방 의료원, 필수 분야 전공의 미달, 3분 진료와 불친절한 진료 태도 등에 화가 난 시민들은 정부 편이었다. 보건의료노조의 설문조사에서 89.6%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

수가조정·수련환경 개선 생략한 채
불쑥 2000명 증원 발표, 갈등 폭발
의료계 파국 피할 최적의 수 찾아야

정부는 의사들을 상대로도 28차례에 걸쳐 협의회를 열면서 설득해 왔다. 그런데 불쑥 2000명 증원을 꺼내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현 정원의 60%가 넘는 규모도 예상을 뛰어넘지만, 왜 2000명인지 설명이 부족했다. 근거가 됐다는 세 가지 보고서의 저자들마저 꼭 한꺼번에 2000명을 늘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 전에 이런 수순을 밟았다면 어땠을까. 우선 전공의 근무시간 한도를 주당 80시간에서 60시간 정도로 줄이고 연속근무 허용을 36시간에서 24시간으로 줄이는 것이다. 상급 종합병원의 전공의 비율을 25% 이하로 제한하고, 나머지 인력을 전문의로 채우도록 의무화한다. 불가능한 일일까? 복지부는 지난주 갑자기 9개 거점 국립대 교수 정원을 1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정원이 1200명가량이니 무려 80%가 넘는다. 그 정도 결기면 병원의 전문의 비율 확대도 쉽게 추진했을 것이다.

지난 1일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로비를 지나고 있다.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2월29일까지 복귀할 경우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최후 통첩을 보냈지만, 이날까지 복귀한 전공의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뉴스1

지난 1일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로비를 지나고 있다.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2월29일까지 복귀할 경우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최후 통첩을 보냈지만, 이날까지 복귀한 전공의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뉴스1

 수술이 많고, 24시간 응급 콜 대기 상태며, 사고 위험까지 높은 분야의 수가를 상대적으로 편하고 덜 위험한 곳보다 확 높이는 방안도 있다. 20년 가까이 필수 의료 분야에서 호소해 온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는 의사협회가 스스로 조율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방치해 왔다. 지금 의협과 전공의들을 대하는 정부의 단호함을 이전에도 유지했다면 못할 일일까 싶다.
 지역에서 10년쯤 의무 근무하는 조건으로 의대생을 뽑는 전형을 마련할 수도 있다. 지역 출신을 뽑고, 장학금도 주되 어기면 면허를 취소한다고 처음부터 못 박는다. 아직 전공의 임용 계약도 맺지 않은 인턴 수료자에게 근무지 이탈로 면허 취소를 고려하는 마당에 못할 것도 없다.
 의사 업무를 일부 대신하는 PA 간호사를 아예 법적으로 보장하고, 일부 미용성형의 문호를 개방할 수도 있다. 이런 걸 일부라도 시행하고, 나머지는 일정표를 제시한 뒤 그래도 부족한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제안했다면 의사들이 정부를 못 믿겠다며 의료 현장을 떠날 명분이 있었을까?

3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 옆 여의대로 인근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 총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의료 탄압 중단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 옆 여의대로 인근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 총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의료 탄압 중단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블루 스폿은 수가 놓일 때마다 새롭게 제시된다. 2000명 증원과 전공의 집단 사직, 다시 복귀 마지노선 제시와 불응이라는 공방이 오가며 의료계의 판은 위태로워졌다. 다음 수는 대규모 처벌과 교수·전임의 진료 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고, 증원 규모까지 포함한 타협점에 돌이 놓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블루 스폿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