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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명산 칠보산 그린 '실감 영상', 미국·한국서 동시에 펼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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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한 칠보산도(七寶山圖). 세로 158.1㎝, 가로 438.2㎝. 작자 미상의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10폭 병풍에 함경북도 명산 칠보산의 풍광을 담았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한 칠보산도(七寶山圖). 세로 158.1㎝, 가로 438.2㎝. 작자 미상의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10폭 병풍에 함경북도 명산 칠보산의 풍광을 담았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함경북도 명천군에 위치한 칠보산. ‘함북 금강’이라고 불리우며 조선 후기엔 진경산수화로 꾸준히 그려진 명산이다.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1751)에서 “명천에 있는 칠보산이 동해 가에 위치하여 골짜기에 들면 바위의 형세가 깎아지른 듯하며 기묘하게 조각된 형상이 거의 귀신 솜씨인 듯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오는 15일(현지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텍스타일 갤러리에서 칠보산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9월 29일까지). 미술관이 소장한 10폭짜리 19세기 한국 병풍 ‘칠보산도병’을 실감영상으로 구현해 세로 3m, 가로 15m 벽면 패널에 펼치는 몰입형 전시다. 같은 기간 서울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한·미 간 1만㎞ 거리를 뛰어넘는 실시간 동시 체험이다.

그간 한국 문화유산 소재의 몰입형 전시가 해외 전시장에 선보인 적은 있지만 해외 미술관 소장품을 소재로 진행하는 것은 처음.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해외 소재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이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축적한 게 기반이 됐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2015년부터 근무해온 임수아(49) 큐레이터의 노력도 컸다.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친 그는 입사 후 애초 한·일 담당이던 자리에서 한국실 담당을 분리시켰고 2020년부터 전임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화상인터뷰로 만났다.

오는 15일(현지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텍스타일 갤러리에서 공개되는 칠보산도 실감 영상. 세로 3m, 가로 15m 벽면 패널에 조선 19세기 후반 진경산수화인 칠보산도를 실감 영상으로 구현한다. 같은 기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오는 15일(현지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텍스타일 갤러리에서 공개되는 칠보산도 실감 영상. 세로 3m, 가로 15m 벽면 패널에 조선 19세기 후반 진경산수화인 칠보산도를 실감 영상으로 구현한다. 같은 기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속하는 칠보산도가 디지털 체험과 잘 맞아떨어지는데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 더는 갈 수 없는 곳이라 한국에도 미국에도 의미가 크다고 봤다”고 임 연구관이 말했다. 그에 따르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미술관이 소장한 약 400점의 한국 문화유산 가운데 13점을 우선 고화질 디지털로 옮겼는데, 이 활용을 두고 양측 뜻이 맞은 게 ‘몰입형 전시’였다. 재단의 지원과 한국 업체 기술력에 힘입어 1호로 선보일 칠보산도병은 원본 자체가 세로 158.1㎝, 가로 438.2㎝에 이른다. 작자 미상의 19세기 작품으로 미술관 측은 1989년 영국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매했다.

이와 함께 1일부터 한국실에선 칠보산도병을 포함한 조선 전·후기 산수화 7점이 상설전 속의 특별전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미술관이 소장한 ‘산시청람도’(16세기 초), ‘한림제설도’(김시, 1584년), ‘평양도병’(김윤보, 19세기 말) 등이다. ‘From Dreaming to Hiking: Korean Landscape Paintings’(꿈에서 유람으로: 한국 산수화)라는 전시 제목이 칠보산도의 특징까지 일러준다.

“진경산수화라는 게 조선 전기의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우리 강산을 실제 유람하고 그린 건데, 그걸 미국인들에게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하이킹’이잖아요. 클리블랜드에도 산이 많아서 하이킹을 많이 하고요. 10분 실감영상 체험이 엔터테인먼트로 끝나지 않고 실제 유물인 칠보산도병 감상으로 이어지게끔 구상했어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한국실에서 임수아 큐레이터(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 석좌 학예연구관)가 포즈를 취했다. 사진 임수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 한국실에서 임수아 큐레이터(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 석좌 학예연구관)가 포즈를 취했다. 사진 임수아

해발 894m의 함북 칠보산은 16세기 들어 조선 문인들의 주목을 받고 17세기 중반 이후 이를 묘사한 글과 그림이 이어지다가 18세기 들어 ‘북관십경’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에는 아예 칠보산만 별도로 그린 8폭 또는 10폭 병풍이 생산됐는데 그만큼 이 산의 유람 수요가 커졌단 뜻이다.

세밀하고 웅장한 필치가 돋보이는 클리블랜드의 병풍은 “17세기 중반부터 200년 이상 이어온 칠보산도의 역사 속에서 축적된 자양분을 모두 흡수한 결정판에 가깝다”(박정애, ‘조선시대 칠보산 유람풍조와 칠보산도 연구’, 2015)는 평가다. 1890년 함경감사 한장석의 주문에 따라 조중묵(1820년경~?)이 그린 ‘관북십승도’ 속 칠보산의 풍광 및 필치가 유사하단 점에서 조중묵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국내에선 2015년 삼성 리움미술관의 ‘세밀가귀’ 전시 때 한차례 나들이한 게 전부다. 임 연구관은 “(훼손이 우려되는) 서화작품의 경우 6개월 전시 후엔 5년간 내놓지 않는 게 미술관 원칙이라 이번 전시도 큰마음 먹고 추진했다”고 말했다. 이번 기획은 “북한의 명승 유물을 미국에서 소개하고 이를 서울에서 실감영상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리 역사의 복잡한 상황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걸 미술관 측이 참신하다고 받아들였다”고 돌아봤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구한말 세브란스 병원의 건립 기금을 댄 오하이오주 굴지의 사업가 루이스 세버런스 일가가 기증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1916년 설립됐다. 다수의 고려청자 외에 고려시대 금속공예 기술을 잘 보여주는 ‘청동은입사발’, 섬세한 표지화와 단정한 서체의 14세기 ‘감지금자『대방광불화엄경』 제78권’, 조선 초 15세기 조형미가 돋보이는 ‘금동아미타여래삼존상’ 등을 소장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한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 16세기 전반 화풍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세로 115.3㎝ 가로 60㎝ 크기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한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 16세기 전반 화풍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세로 115.3㎝ 가로 60㎝ 크기다. 사진 클리블랜드 미술관

그럼에도 중국실(2400여점)·일본실(3100여점)에 비해 한국실의 규모와 소장품이 훨씬 부족하다. 한국실이 별도 마련된 것도 2013년 국제교류재단 기금을 통해서다. 임 연구관은 “처음 왔을 땐 동아시아 담당의 일본인 학예사가 있었고 제가 보조하는 역할이었는데, 미술관 측에 ‘식민지 역사도 있는데 한국 미술이 일본 미술에 종속되는 모양새는 문제 있다’ 했더니 독립 보직으로 바꿔줬다”고 돌아봤다.

“여기 한국실에 윤형근·박서보 등 현대 작가 작품도 있지만, 예컨대 한국의 반도체가 있기까지 수천년간 어떤 기술과 문화가 있었는지 알려주는 증거가 문화재잖아요. 미국에 나와 있는 한국 유물이 우리 문화사절이란 점에서, 더 알리고 연구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의 한국 담당 큐레이터 임수아 학예연구관(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 석좌). 사진 임수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미술관의 한국 담당 큐레이터 임수아 학예연구관(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 석좌). 사진 임수아

◇임수아 큐레이터는=1975년생. 랏거스 뉴저지주립대 미술사 석사 후 홍익대 미술사 석사, 캔자스주립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클리블랜드미술관에 2015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입사했고, 2020년 한국 담당 큐레이터로 승진, 현재 미술관 소속의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미술 석좌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전시로는 ‘황금바늘: 한국의 자수예술(Gold Needles: Embroidery Arts from Korea)’(2020.3.7.∼10.25.)과 ‘책거리: 한국 채색 병풍에 나타난 소유의 즐거움(Chaekgeori: Pleasure of Possessions in Korean Painted Screens)’(2017.8.5.~1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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