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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뽕'에 일본인 끝냈다…18세 김두한, 조선 주먹왕 오르다

중앙일보

입력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장군의 아들 ①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 혐의로 수감됐던 김두한 의원이 출감하면서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 혐의로 수감됐던 김두한 의원이 출감하면서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람의 역사는 늘 그 궤도를 따라 펼쳐져 왔는지 모른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그 내용 말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그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자만이 주인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 김남주는 한 술 더 뜬다. ‘종과 주인’이란 시에서 그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라며 역시 변증의 논리를 꺼내든다. 인간의 자유를 향한 프랑스대혁명의 서슬 퍼렇던 낫은 끝내 단두대의 피비린내로 얼룩진다. 권력이라는 야만의 총은 명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인과 노예의 삶을 강제한다. 500년을 이어 온 봉건 조선의 학정은 수많은 질서에 그저 말없이 따르는 순응자들을 만들었다.

우리를 제국의 식민 나락으로 몰아넣은 유교 원리주의 조선왕조의 매국은 급기야 수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떠나는 결과를 빚었다. 동북아는 그로써 세계열강의 다툼 현장으로 변했다. 지금도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의 대립은 여전하다. 당시 조선인들은 동학 노래 ‘새야 새야’에 맞춰 “소련 놈에 속지 말고 미국 놈을 믿지 마라. 일본 놈이 일어서니 조선사람 조심해라”라고 노래했다.

3·6대 국회의원, 국회 오물투척 주역

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 〈장군의 아들〉 전단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 〈장군의 아들〉 전단지.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렇게 친(親)과 반(反), 그리고 사대(事大)와 자주(自主),  애국과 매국의 이분법적 갈등에서 정반합(正反合)의 변법자강(變法自疆)이 송두리째 뽑혔다. 그런 역사의 과정 속에서 좌우익을 빙자한 기회주의가 발호하며 ‘민족’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또 다른 주인과 노예의 역사가 펼쳐진다.

작두날 위에 선 무당의 칼날 같은 살벌한 시절을 산 김두한(金斗漢)이라는 사내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그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대한청년당의 감찰부장, 제 3대와 6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국회 오물투척사건을 일으킨 정치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두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의송(義松)·가송(嘉松). 별칭은 ‘잇뽕(いっぽん·一本), 즉 ‘한 방’이다. 주먹 한 방으로 세상을 평정한 조선의 사나이라는 의미 맥락에서다. 그의 출생지는 경성(당시 서울 호칭)부 종로 삼청동이다. 북두칠성의 두(斗), 그리고 놈이나 사나이를 지칭하는 한(漢)을 쓰니 그는 곧 ‘북두칠성의 사내’다. 그의 생부인 김좌진 장군이 지어준 이름이다.

김두한을 일제 강점기 조선 최고의 건달, 주먹 황제, 협객, 정치인으로 평한다. 옛 속담에 ‘돈 있으면 한량, 돈 없으면 건달’이라 했지만, 그의 삶은 인생 무대에 온몸으로 서는 광대(廣大)이자 풍류객이랄 수도 있었다. 칼과 낫, 총을 들던 시대 그는 주먹으로 전국을 평정하며 산 사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와, 미(美) 군정 시기에는 군정과 맞섰고, 좌우익 대립 공간에서는 좌우익을 넘는 민족 반공투사로, 그리고 독재에 맞서 민주투사로 살았다. 주인과 종이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역사의 한 복판, 웃통 벗고 대낮에 절대 권력에 맞서 혈기 넘치는 북두칠성의 사내로 거침없는 투쟁의 역사를 살다 갔다. 비록 거대한 군부 권력의 고문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우리는 의협(義俠)이라 불러도 좋을 이 김두한이라는 사내의 역사를 통해 오늘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묻는다.

김효천 감독, 이대근 주연 〈협객 김두한〉 포스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김효천 감독, 이대근 주연 〈협객 김두한〉 포스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김두한의 식민지 시대-해방기의 활약을 다룬 전기 영화 〈실록 김두한〉, 〈협객 김두한〉, 〈김두한(속 3부)〉, 〈김두한(속 4부)〉를 분석의 대상으로  영화 속 민족의 협객으로서 김두한이 강조하는 ‘의리’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 엘리트의 훼절에 대조되는 ‘조국에 대한 의리’ 즉 항일의 의미를 지녔다. 해방기에 의리는 좌익, 기회주의자, 협잡꾼들의 논리를 이기는 ‘질서, 법’ 나아가 ‘반공’의 가치를 의미했다. 김두한은 의리로 식민지로부터 해방기를 가로지르는 근대사회의 정통성을 구현해 냈다. 영화 김두한 시리즈는 반외세에 대한 정서를 분명히 한 국수주의에 가까운 이념을 선보였다. 논리보다 주먹, 말보다 행동을 앞세운 김두한 시리즈는 피의 수사학, 반 지성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반 지성주의와 유신의 반 영웅으로 대중들의 보수적 정서를 자극하는 유신시대의 반 신화로서 존재했다. 〈송효정,  우리어문연구 62권〉

김두한은 주인과 종의 권력투쟁이라는 칼날 위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로운 해방의 삶을 산 건달(乾達)이다. 건은 乾(하늘)이요 달은 達(통달)이다. 건달은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니 원래 말 간다르바(Gandharva)가 그렇다.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적 존재인 간다르바는 음악을 사랑하며 향기를 먹고 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불법(佛法)의 도를 향해 지나는 길목에 건달이 있다. 사천왕(四天王)을 통해 건달을 본다. 용(龍)과 여의주(如意珠), 비파(琵琶)를 들고 칼을 품은 채 온갖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악을 짓밟고 있으니 악의 무리를 제압하는 건달은 곧 의인이다.

종로는 천하의 중심이요 사천왕들이 모인 현실거리이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한양 거리 곳곳에 조선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대문을 세우고, 그 복판에 보신각(普信閣)을 만들었다. 그 믿음의 신(信)으로 종을 만들어 오행(五行)이 서로 맞물리는 수도 한성을 만들었다. 돌고 도는 세상 속, 복판의 로터리였던 종로는 서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고, 사람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조선 궁궐을 관통하는 길을 만들고, 청계천 이남 남촌에 황금정(黃金町·을지로), 본정(本町·충무로), 명치정(明治町·명동)에 5만 명 규모 일본인 거주 신도심을 건설했다.

작(昨 어제) 오후 12시경에 부내 종로서에서는 부내 우미관 앞과 탑골 공원 앞에서 폭력단의 혐의자 이만근 이하 20명을 일제히 검속하였다. 금 31일에도 그들을 엄중히 취조중인데 그들은 우미관과 탑골공원 등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가지의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혐의다(동아일보 1934. 06. 01)

일본 주먹 하야시, 본명은 선우영빈

김두한이 활약했던 극장 우미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김두한이 활약했던 극장 우미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은 1910년에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1910년 일본인에 의해 ‘고등연예관’으로, 1915년 우미관으로 개칭했다. 대사를 소리로 전할 수 없어 변사(辯士)가 해설을 맡는 무성(無聲)영화 방식이었다. 1928년에 와서야 최초로 유성(有聲)영화를 상영한 후 우미관은 1945년 해방 때까지 단성사, 조선극장과 함께 도심의 주요 개봉 극장이었다. 조선 제일의 주먹이었던 김두한은 이 우미관을 거점으로 종로 지역에서 활약했다.

김두한은 약관 18세에 종로 우미관의 주먹 건달 왕으로 등극한다. 김두한의 싸움 실력은 아주 두드러졌다. 일반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빼어나게  정확했다. 특히, 여러 명과 싸울 때 옆 사람의 어깨를 짚고 발차기로 단숨에 상대를 제압하면서 ‘한 방’이라는 ‘잇뽕’으로 이름을 날렸다.

종로의 우미관 극장 주인은 ‘와카사키’란 일본인이었다. 극장의 질서를 잡는 ‘기도’겸 운영의 뒤를 봐주던 복싱 선수 출신 김기환에 이어 일본인 서커스단에서 칼로 묘기를 부리던 미또리오가 온다. 미또리오는 성격이 포악해 여성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면서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김두한은 이때 결투 신청을 하여 한 주먹에 미또리오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종로를 제패한 구마적과 신마적을 차례로 제압하며 비로소 김두한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전국구에 버금가는 조직을 이룬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본정3정목(현 충무로 3가)에는 하야시라는 일본 주먹들의 두목이 있었다. 하야시는 일찍이 창씨개명한 조선인으로 어려서부터 일본에 넘어가 도호야마 미쓰루(頭山 滿)의 수하가 된다. 도호야마는 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야쿠자들을 양성하며 대륙침략의 야심을 가졌고, 손문과 김옥균에게 정치자금을 주기도 했다. 하야시는 이런 일본 거물의 힘을 등에 업고 조선의 종로·명동·충무로를 접수했다. 유흥가를 중심으로 돈을 거둬 ‘조직’을 세웠다.

하야시는 선우영빈이 본명이었다. 두 조선인의 만남은 이른바 김두한의 북촌 패와 선우영빈의 남촌 패 사이에서 벌어지는 숙명적 대결이었지만 수표교 싸움 이후 둘은 형님과 아우를 이룬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태균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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