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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수영 5관5포, 임란 1년 전부터 리빌딩 나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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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호 16면

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①

이순신을 무인으로만 평가하는 건 그의 진면목 가운데 일부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순신은 문무 겸전의 전략가였을 뿐 아니라, 트렌드를 읽고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위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승리를 거머쥘 줄 아는 진정한 경영자였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인사 전략가였으며,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을 던져 넣는 희생과 섬김의 리더십도 갖추었다. 분열과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진정한 지도자가 바로 이순신이다.  ‘장군’ 이순신을 넘어 ‘경영자’ 이순신의 모습을 짚어보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이순신 전문가인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순신 장군 동상. [뉴스1]

이순신 장군 동상. [뉴스1]

이순신은 36세인 1580년에 발포(지금의 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萬戶)에 임명되어 1582년 1월까지 봉직했다. 만호는 조선시대 각 도의 진에 딸린 종4품 무관직이다. 이순신은 발포에 이어 훗날 함경도 조산보 만호 직을 수행하며 초급 장교로서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특히 발포 시절의 수군 경력은 육군 출신인 이순신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필자는 발포 만호 이순신이 31살 많은 역전의 용사 정걸 장군을 만나 수군 경영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조선 시대  지방관들이 임지로 부임하면 그 지역의 이름난 학자나 낙향해 있던 전직 관료, 무장을 찾는 것이 관례였다. 정걸은 경상우수사를 끝으로 은퇴한 뒤 고흥에 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의 생가와 묘가 모두 고흥에 있다. 이순신은 훗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정걸 장군을 조방장으로 초빙했다. 발포 만호 시절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인사다. 이순신의 인맥 경영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1580년 발포 만호 부임, 수군 경영 경험익혀

이순신이 수군 경험을 제대로 발휘한 곳이 5관(官)5포(浦) 지역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남서해안 일대에 5개 수영을 운영하고 있었다. 보령의 충청수영이 13관 5포, 해남의 전라우수영이 12관 15포,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5관5포, 거제의 경상우수영이 8관 16포, 동래의 경상좌수영이 18관 16포를 거느리고 방어선을 펼쳤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관할지는 전체 수군 편제에서 가장 작지만 전략적 가치는 대단히 컸다. 경상도 지역의 육상이나 해상에서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호남 곡창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거느린 5관은 순천·보성·광양·낙안·흥양, 5포는 방답(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사도(고흥군 영남면 금사리)·발포(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여도(고흥군 점암면 여호리)·녹도(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였다. 5관5포를 거느리는 전라좌수영이 중요한 것은  특히 흥양(고흥의 옛이름)은 전라좌수영 5관5포 중 1관4포가 포진했던 군사요충지였다. 1관(흥양현)은 바다와 잇닿는 육지 행정구역이고, 4포는 전라좌수영 본영을 바다 쪽에서 지키는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이다. 4포를 막지 못하면 적의 수군이 육군 병력을 싣고 들어오거나 병참을 공급하게 돼 전쟁이 기울게 된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경영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결합한 조직 또는 그 활동을 말한다. 경영의 핵심은 의사결정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경영이란, 만약에 닥쳐올지도 모를 위기 상황을 가정해 법과 원칙에 따라  현장을 점검하고 유비무환의 자세를 갖추도록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경영활동을 부지런하게 그리고 꼼꼼하고 치밀하게 했다. 현장의 장수들은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별난 상사가 하나 부임해 오더니 편안하게 지낼 틈을 주지 않고 수시로 군비를 점검하고, 뇌물과는 담을 쌓은 채 일벌백계로 사정없이 처벌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덕분에 호남 곡창과 서남해를 지킬 수 있었고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것은 1591년 2월 13일이었다. 좌수영 산하 전체 병선은 판옥선과 작은 배인 사후선(伺候船)까지 85척이었고, 병력은 우후·첨사·만호 등의 지휘관을 포함 1만8403명이었다. 문제는 기록대로 다 존재하느냐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2월 3일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새벽에 우후(虞候)가 각 포구의 부정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 우후는 지방 군영의 군사훈련과 무기 등을 점검하는 참모로 수군의 경우는 대개 정4품이었다. 이순신은 우후를 파견해 각 포구에 만연하던 부정, 횡령, 유용 등을 점검토록 했다. 실제 조선의 수군들 가운데 무기와 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다음 날엔 여수시 종고산의 봉수대에 올라가 유사시 연락망을 점검하고 해자 구덩이를 살펴보았다. 그는 매일 동헌에서 활을 쏘며 수련을 계속했고 부하들에게도 쉼 없이 활쏘기를 시켰다.

흥양전선소 추정지. 도로와 하천 정비로 선소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사진 윤동한]

흥양전선소 추정지. 도로와 하천 정비로 선소 자리는 사라지고 없다. [사진 윤동한]

8일자 난중일기엔 그 유명한 거북선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8일 맑았으나 또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으로 나갔다. 공무를 처리했다. 이날 귀선(龜船·거북선)의 돛으로 쓸 베 29필을 받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운용할 채비를 마쳐가는 참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에 완성돼 전투에 배치된다. 15일에는 전선을 정박하는 포구(굴강)의 담을 보수하게 해 방비를 든든히 했다. 굴강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수리 건조하던 곳으로 발포나 여수 선소 등에서 아직도 발견되고 있다.

2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뤄진 전라좌수사 예하 지역 순시는 이순신이 경영자로서의 임무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 준다. 여도-흥양전선소(戰船所)-녹도-발포-사도-개이도-방답-좌수영으로 이어지는 144㎞이상의 장거리 순시였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말을 달려 7박8일만에 순시를 마쳤다.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이를 두고 꽃비(花雨)가 쏟아졌다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칼 찬 선비’라는 표현 그대로 이순신은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시적 감흥을 잊지 않았다. 이 순시 기록 중에 나타나는 흥양전선소의 위치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2019년 (사)서울여해재단 교수진 일행이 고흥지역 답사를 갔을 때 필자가 찾아내 세간에 알린 바 있다.

경상우수사 지낸 정걸 조방장 초빙 인맥경영

덕흥선소 표지판 만이 이곳 근처가 흥양전선소 자리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사진 윤동한]

덕흥선소 표지판 만이 이곳 근처가 흥양전선소 자리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사진 윤동한]

이 무렵의 난중일기는 당시 전쟁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5일 흐렸다. 각 항목의 전쟁 준비에 탈이 난 곳이 많았다. 군관과 색리들의 죄를 처벌했다. 방어 준비가 5포 중에서 최하였으나, 순사(순찰사 이광)가 임금님께 상을 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표창을 상주하는 글을 올렸기에 죄를 조사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를 출발시킬 수 없었다. 그대로 묵었다.” 좌수사 이순신은 문제를 찾아냈지만 순찰사가 덮어버렸다. “26일 이른 아침에 배를 출발했다. 개이도에 도착했더니, 여도 배와 방답의 마중 나온 배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방답에 도착했다. 군기물을 점검하고 검열했는데 장전과 편전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슴만 탔다. 전선은 두 번째로 우수했다. 기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쟁이 있을지 없을지를 놓고 조정이 양분되어 있을 때, 전장을 지키는 장수로서 홀로 방어요새를 점검하고 군비 상태를 확인했으며 화약을 주조하고 전선(판옥선)을 정비하며 군사를 치열하게 훈련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강점은 병참과 보급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한 것이다. 임진년 3월 6일 난중일기다. “6일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가 좌기했다. 군기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활과 갑옷, 두무(兜鍪·투구)와 용아(筩兒·화살통), 환도는 깨지고 훼손된 물건이 많이 있었다. 제 모양을 갖추지 못한 놈도 아주 많았다. 색리와 궁장(弓匠) 감고(監考) 등의 죄를 따졌다.” 군사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상필벌이다. 궁장과 시인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다. 이순신은 이들을 철저히 관리 감독하여 수군의 주 무기인 활과 화살을 충분히 비축토록 했고 가장 중요한 총통 화약도 대량 준비했다. 난중일기에는 무신 이봉수(1553~?)가 전라 좌수영과 돌산도 사이에 쇠사슬을 설치했고 북봉에 연대(봉화)를 구축했다고 적혀 있다. 특히 화약 제조를 위한 염초를 개발해 3개월 동안 1000근을 만들어냈다고 이순신이 장계로 보고했다. 이순신의 지시에 의한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이로써 이순신은 무기와 화약, 방어시설을 완비하고 본격적인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 ‘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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