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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파묘’와 쇠말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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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9호 30면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김홍준 기획담당선임기자

영화 ‘파묘’는 우리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승전, 쇠말뚝일까요. 장재현 감독은 “풍수사들과 땅을 얘기하다가 보면 결국 쇠침에 다다랐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쇠말뚝’, 그리고 작은 글씨로 옆에 한자 ‘鐵針(철침)’으로 적습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영화는 ‘일제의 쇠말뚝 박기’를 모티브로 합니다. 일제가 혈(穴)자리에 쇠말뚝을 박아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풍수침략’이라고 부릅니다.

일제 쇠말뚝 뽑기 운동이 크게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딱히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정도입니다. 1995년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가 심은 쇠말뚝을 대대적으로 뽑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쇠말뚝 뽑기가 정부 주도로 바뀐 겁니다. 당시 민간 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는 ‘1985년 북한산 백운대에서 길이 40㎝, 직경 3㎝의 쇠말뚝 22개를 뽑았고, 93년 9월에는 속리산 문장대에서 2개를 제거했다’는 성과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쇠말뚝, 민족정기 압살 의도”
영화 모티브지만 현재도 진위 논란

쇠말뚝으로 민족정기를 누르려 했다는 기사는 200여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정조실록 1797년 6월 24일 첫 번째 기사입니다. 정조는 인재가 없음을 걱정하며 “명나라 초기(고려 공민왕 19년)에 (명나라) 도사 서사호가 단천(함경남도) 현덕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장 오래된 ‘쇠말뚝 침략론’이라고 알려졌습니다.

1995년에 기세를 탔던 ‘풍수 침략론’은 ‘토지 측량론’에 부닥쳤습니다. 일본은 1895년 200명 넘는 측량사를 보내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사업을 위한 삼각측량을 시작합니다. 일본은 정작 본토 측량은 소홀히 하고 한국·대만·만주 등에서는 열을 올릴 정도로 측량은 침략의 필수조건이었습니다(한국지적학회지). 쇠말뚝이 발견된 지점을 보면 이런 ‘삼각측량’을 위해 표시목으로 박은 위치와 대부분 일치한다는 게 ‘토지 측량론자’들의 주장입니다. 한 시사잡지엔 “측량을 위해 산 정상 등에 삼각점을 설치했다”는 당시 측량 기사의 증언도 나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한 기제인지, 영화 ‘파묘’에서 이렇게 대화가 짧게 오갑니다. “(쇠말뚝은) 토지측량용이라고 했잖아. 99%가 가짜잖아.”(영근-유해진) “그럼 1%는?”(상덕-최민식)

영화 속 최민식과 유해진은 쇠말뚝을 찾습니다. 북위 38.3417도, 동경 128.3189도입니다. 한반도의 허리이자, 휴전선에 막혀 남쪽에서 갈 수 있는 백두대간의 최북단입니다. 현행 교과서대로라면, 태백산맥이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태백산맥·소백산맥·차령산맥 등 산맥 이름은 20세기 초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지질학 상으로 분류해 붙였습니다. 줄기 상으로 분류한 대간·정맥 등과 다릅니다. 우리 풍수는 이 줄기에 정기가 서려 있다고 봅니다.

정말 쇠말뚝은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혈’에 박혔을까요. 아니면 구석구석 침탈을 하기 위한 측량용이었을까요. 한 풍수지리학자는 “쇠말뚝이 문제라면, 현재 산속의 송전탑과 전봇대는 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다른 학자는 “뽑았다고 하는 일제의 쇠말뚝 길이가 1m가 채 되지 않는데, 혈맥을 누르려면 2m 정도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묘’는 연휴가 지나면 관객 500만 명에 근접할 것으로 보입니다. 장재현 감독은 “반일은 안 도드라지게 하려 했다”고 밝혔지만, 역풍도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은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3·1절이 다시 지났습니다. 좋든 싫든, 크든 작든 일본의 그림자가 아직도 어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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