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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후손이 기증했다는데…美 걸린 박수근 그림 위작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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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박수근의 ‘와이키키’(1960년대 초반). [사진 독자]

박수근의 ‘와이키키’(1960년대 초반). [사진 독자]

파란 하늘에 흰 점을 툭툭 찍어 음영을 표현했다. 야자수가 있는 이 해변 풍경을 박수근(1914~65)의 ‘와이키키’라고 했다. 또 다른 유화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1961년경)는 박수근 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아이 안은 여자, 광주리 인 여인, 주저앉은 여인의 뒷모습으로 화면을 꽉 채웠다.

연간 100만 명 넘는 관객이 다녀가는 미국 서부 최대의 공립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 걸린 박수근·이중섭 그림 네 점이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미술관이 지난 25일부터 공개한 ‘한국의 보물들’ 전시 출품작이다.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1961년). [사진 독자]

‘세 명의 여성과 어린이’(1961년). [사진 독자]

이중섭(1916~56)의 유화라는 ‘황소를 타는 소년’(1953년경)은 소의 몸통만으로 화면을 꽉 채운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와 달리 풍경화 위에 그의 ‘흰 소’ 이미지를 덧그리고 소 등에 소년도 태웠다. 타일 그림 ‘기어오르는 아이들’도 있다. ‘와이키키’와 ‘기어오르는 아이들’이 진품이라면 박수근의 미국 풍경화, 이중섭의 타일 그림으로 ‘세계 최초’다.

LACMA는 한 재미 교포가 2021년 기증한 100여점 중 35점의 한국 고미술과 근대미술·수석을 골라 전시를 열었다. 기증자에 대해서는 “LACMA 전 이사회 멤버이자 ‘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조선 왕조 마지막 왕비의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기증자는 2021년 당시 “고미술품은 명성황후의 15촌 조카인 외증조부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고 한국 근대미술은 1970년대 초 한국에서, 북한 미술품은 워싱턴DC 등지에서 열린 비공개 전시회를 통해 사들였다”면서 “이중섭은 재료가 없어 올리브 오일과 미군 차량 기름을 이용해 박스에 ‘황소를 타는 소년’을 그렸다”고 말한 바 있다.

이중섭의 ‘황소를 타는 소년’(1953~54년)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전시 중인 한국 작가의 그림들. [사진 독자]

이중섭의 ‘황소를 타는 소년’(1953~54년)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전시 중인 한국 작가의 그림들. [사진 독자]

이번 전시에선 이 기증자가 기증한 18세기 불화와 높이 67.5㎝의 18세기 청화백자, 월북 화가 이쾌대(1913~65)의 1950년대 초반 풍경화, 평양 출신 김관호(1890~1959)의 ‘딸의 초상’(1957)과 1950년대 풍경화 등이 공개됐다.

국내 감정 관계자들은 “사진 이미지로만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박수근·이중섭, 그리고 북한에서 활동한 화가들로 구성된 그림들만큼은 출처와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LACMA의 ‘한국의 보물들’ 전시. [사진 독자]

LACMA의 ‘한국의 보물들’ 전시. [사진 독자]

지난 2022년 이 그림들을 직접 본 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수장고에서 10여 점을 본 뒤 박수근·이중섭·김관호 등 몇 점에 대해 ‘위작’이라는 의견서를 써 줬다”고 밝혔다. 윤 전 관장은 “필요하면 한국의 전문가와 감정기관에 원격 감정을 의뢰할 수 있다고 조언했는데 미술관이 전시를 강행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관객들이 ‘한국 근대 미술의 대표작이라는 것이 이런 수준인가’ 오해할까도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국미술품감정가협회장을 지낸 그는 “그림값이 비싼 박수근·이중섭 등은 지금도 꾸준히 위작이 제조·유통되고 있어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전문가가 적은 미국의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주목된다”고 말했다.

박수근의 장남 성남(77)씨도 “거친 갈색을 주조색으로 우리 이웃들의 정감 어린 일상을 담은 아버지가 하와이의 파란 하늘을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물화도 전형적 ‘짜깁기’다. 주요 인물 도상을 여기저기서 가져다가 맥락 없이 붙였다”고 말했다.

LACMA 측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 진위를 의심하는 의견이 있는데, 진품으로 보는 근거와 검증한 전문가를 알려달라”는 중앙일보 질의에 대해 “아시아 미술부장인 스티픈 리틀이 3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전시에 포함된 모든 작품을 상세히 조사했고, 그 연구 결과는 향후 발행할 도록에 게재할 것”이라고 답했다. 또 “출품된 20세기 중반 유화는 기증자 집안에서 50년 이상 간직하던 것이며 추가 기증을 약속한 300점은 검토 중에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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