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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인생

모든 게 완벽했던 대학생 때 전신마비…목숨 걸고 치과의사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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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19일 분당서울대병원 4층 건강증진센터 치과 클리닉에서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이규환 교수를 만났다.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하고 싶은 치과 의사가 됐다. 김종호 기자

지난 19일 분당서울대병원 4층 건강증진센터 치과 클리닉에서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이규환 교수를 만났다.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하고 싶은 치과 의사가 됐다. 김종호 기자

손을 못 쓰는 치과의사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믿기 어려운 세계 유일의 최중증 장애인 치과의사인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45)다. 그를 지난 2월 19일 이 병원 건강증진센터 치과 클리닉에서 만났다. 어깨 일부와 양 손목 외엔 전신 마비인데 국립재활원·장애인고용공단 등과 함께 만든 보조기구를 이용해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환자를 본다. 그가 들려준 인생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인생 1막  자만, 그리고 끝없는 추락

세상이 쉬웠다. 공부 잘했고, 188㎝ 큰 키에 걸맞게 테니스·수영 등 못 하는 운동이 없었다. 의대보다 편한데 돈은 더 잘 번다니 잘 먹고 잘살고 싶어 치과대학(단국대 치대)에 갔다. 소명의식, 그런 건 없었다. 졸업하면 돈 많이 벌어 좋은 집에서 좋은 차 몰고 여행 다니며 살 거라 믿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풀릴 거라는 자만은 찰나의 순간, 꺾였다.

사고로 마비…죽지 못해 살아
"공부 원하면 돕는 게 교수 역할"
복학 도운 교수가 내게 했듯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 되고파

말 그대로, 꺾였다. 치대 본과 3학년 때인 2002년 여름 친구 따라간 수영장에서 다이빙하다 목이 부러졌다.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손발은 물론 심장·폐를 움직이게 하는 주요 신경이 지나가는 경추 3, 4, 5, 6번이 손상됐다. 사지가 마비돼 호흡조차 잘 안 되는 채로 중환자실에서 일주일만에 눈을 떠 죽을 날만 기다렸다. 울면서 기도하고 또 했다. "하나님, 저를 일으켜 세워주세요. " 기적은 없었다. 살려달라던 기도는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로 바뀌었다. 피를 엄청 흘릴 정도로 세게 혀를 깨물기도 했는데, 너무 아파서 죽을 만큼 깨물지는 못했다. 온종일 각종 수치가 오르고 떨어질 때마다 '삐삐' 울리는 경고음과 내 혈관이 계속 터지는 거보다 옆에서 고함치고 울고 비명 지르다 죽어 나가는 다른 환자를 매일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다. '나도 곧 저렇게 될 텐데'라는 생각에 미칠 거 같았다. 버틴 게 아니라 버텨졌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니.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는 본인이 직접 만든 도구를 검지 손가락에 끼고 진료를 본다. 단순해 보이지만 10여 번 업그레이된 소중한 도구다. [사진 이규환]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는 본인이 직접 만든 도구를 검지 손가락에 끼고 진료를 본다. 단순해 보이지만 10여 번 업그레이된 소중한 도구다. [사진 이규환]

인생 2막  희망, 그리고 무모한 도전 

중환자실이라 가족 면회는 하루 한두 번 20~30분간 짧게 허용돼서 사실상 24시간을 혼자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견디기 어려웠다. 간호사들에게 10분이라도 좋으니 읽을거리를 보여 달라고 했다. 정신은 멀쩡한데 사지 마비된 젊은 환자가 불쌍했는지, 시간 날 때마다 돌아가면서 '샘터' 잡지나 역경을 극복한 이들을 다룬 신문기사 등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글을 펼쳐서 보여줬다. 때론 무협지나 『슬램덩크』같은 만화책을 들고 왔다.

차츰차츰 희망이 생겼다. 당장 내일 죽더라도 하고 싶은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치과의사였다. 설령 못 되더라도 노력이라도 하다 죽고 싶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너무 절실했고, 너무 무식했다. 일단 부딪혔다.

단국대병원을 거쳐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퇴원한 후 어머니와 두 살 터울 형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갔다. 모든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아예 문을 안 열어주는 교수도 있었고, "이 학생이 뭘 할 수 있느냐, 졸업시킬 수 없다"는 모진 말을 내뱉는 교수도 있었다. "힘내라"거나 "열심히 하라"면서도 "어떻게 도와줄지 모르겠다"고 난감해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해보자, 도와주겠다"고 용기를 북돋워 줬다. 이제는 고인이 된 신승철 학장이었다. "네가 이렇게 하고 싶어하는데 왜 전과하거나 퇴학당해야 하느냐. 학생이 공부하고 싶다면 당연히 하게 해주는 게 교수의 일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느냐. 하다 그만두더라도 일단 해보자. "

전신마비 장애인이 무슨 치과의사냐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단 한 사람, 이제 고인이 된 당시 신승철 단국대치대 학장만은 ″해보자, 도와주겠다″고 했다. [중앙포토]

전신마비 장애인이 무슨 치과의사냐며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단 한 사람, 이제 고인이 된 당시 신승철 단국대치대 학장만은 ″해보자, 도와주겠다″고 했다. [중앙포토]

나를 거부한 데 대한 오기, 나를 믿어주는 데 대한 고마움에 신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이거 하다가 죽겠습니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해내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

위기는 금세 찾아왔다. 욕창이 심해져 엉덩이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곪고 짓물렀다. 의사는 이대로 두면 다리 절단 정도가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며 당장 수술을 권했다. 회복까지 최소 3개월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수술을 거부하고 공부를 이어갔다. 또 휴학하면 학교가 절대 다시 안 받아줄 테니 일단 방학까지만 버티게 해달라고 버텼다. 휠체어에서 기절하면서 버텼다.

욕창·패혈증….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은 물론 몇몇 교수가 아예 본인 진료나 실습·강의에 얼씬도 못 하게 막아 곤란을 겪었다. 방법은 딱 하나. 무식하고 지독하게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마비는 여전했지만 기구를 손에 묶어 '괴물손'이 될 때까지 수만 번 연습하고 또 했다. 신기하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주위에서 도왔다. 그 교수가 자리를 비우면 후배 교수가 진료를 보게 해줘서 졸업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극한 고통을 감수하며 따낸 치과의사 자격증에 "내 노력은 1%뿐이고 나머지는 주변 사람들이 손을 잡아준 덕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는 본인이 직접 만든 도구를 손가락에 끼고 진료를 본다. 처음 분당서울대병원에 왔을 땐 "병신"이라 욕 하고 침까지 뱉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김종호 기자

세계 유일의 전신마비 치과의사인 분당서울대병원 이규환 교수는 본인이 직접 만든 도구를 손가락에 끼고 진료를 본다. 처음 분당서울대병원에 왔을 땐 "병신"이라 욕 하고 침까지 뱉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김종호 기자

인생 3막  벽, 그리고 사람

복학 후 유일한 소원은 치과의사였다. 되고 나니 또 벽이었다. 분당서울대병원에 들어오기 전 1년 동안 큰 병원, 작은 병원 가릴 것 없이 100번 이상 거절당했다. 절망해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그런데 경험이 참 무섭다. 한 번 막힌 벽을 넘어봤는데, 한 번 더 못할 게 없다 싶었다. 무조건 덤볐다. 실력이 받쳐준다면, 벽인 줄 알면서도 두드리면 꼭 정문까진 아니더라도 옆길 정도는 만들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인터넷으로 지원하고 "원장, 부원장, 기획실장, 센터장, 행정실장 바꿔달라"고 전화했다. 계속 메모를 남겼다. 그렇게 열린 게 분당서울대병원이다. 2005년 7월 한 번 와서 진료를 보라고 했다. 테스트였다. 병원장·부원장·과장·행정실장이 전부 와서 어떻게 진료 보고 환자에게 설명하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선입견 없는 열린 마인드로 받아줬다. 나중에 "왜 받아줬느냐"고 물었더니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하도 귀찮게 해서 한 번 와보라 했는데 잘하네. "

의사 생활 초기에는 기구를 손에 묶어서 했는데 상처가 워낙 많이 나기도 하고 환자 보기에도 안 좋아서 이젠 검지 손가락에 끼는 보조기구를 직접 주문 제작해서 사용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업체에 사기당하는 등 우여곡절과 10여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실제 진료는 또 다른 벽이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병신한테 진료받으란 말이냐"고 고함을 쳤고, 또 다른 어떤 중년 남자는 "재수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얼굴에 침 뱉는 사람도 많았다. 욕하고 침 뱉은 사람들, 절대 원망 안 한다. 오히려 이해한다. 나라도 진료받기 싫었을 테니. 사고 후에야 어려운 사람, 남의 사정이 눈에 들어왔다. 또 나 아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들었다. 어찌 보면 스스로 다치지 않으려 그랬던 거 같다. 욕하고 무시하는 말을 전부 내 입장에서 받아들였다면 마음이 썩고 상처받아 못 살았을 테니까. 그런데 상대 입장에서 또 다른 시선으로 보면 다 이해가 간다.

그래서 두렵고 진료받기 싫은데 말 못하고 앉아 있는 환자에게 항상 얘기했다. "제가 느립니다. 하지만 실력은 최고고요.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고 꼼꼼하게 봐 드릴 거예요. " 진심은 결국 통한다. 최선을 다해 6개월쯤 지나다 보니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가 생겼다.

전신 마비지만 앉아만 있으면 건강이 악화하기에 집에서 매일 기구를 이용해 한 시간씩 서 있는다. 처음엔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로 어려웠다. 세 끼 식사도 다 하면 안 되기에 저녁 한 끼 정도만 제대로 챙겨 먹는다. 그래도 환자는 최고로 진료한다. [사진 이규환]

전신 마비지만 앉아만 있으면 건강이 악화하기에 집에서 매일 기구를 이용해 한 시간씩 서 있는다. 처음엔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로 어려웠다. 세 끼 식사도 다 하면 안 되기에 저녁 한 끼 정도만 제대로 챙겨 먹는다. 그래도 환자는 최고로 진료한다. [사진 이규환]

에필로그  내일은 없다

힘들 땐 죽게 해달라, 그다음엔 치과의사가 되게 해달라, 직업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지금은 아무 소원이 없다. 한 번뿐인 인생을 그저 열심히 살 뿐이다.

처음엔 달랐다. 후회뿐이었다. 그날 그 버스를 타지 않았더라면, 수영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하면 삶이 과거로 간다. 지금을 사는 게 아니라 과거에 갇힌다. 희망 없고 스스로 너무 보잘것없고 불쌍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사고를 악몽이 아닌 좋은 추억으로 생각했더니 내 삶에 감사하게 됐다. 장애인으로서 불편하고 힘든 상황을 겪을 때도 불만 대신 어떻게 바꾸면 좀 더 편해질까,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 시선이 두려워 자꾸만 숨는 장애인들에게 무조건 사회에 나와 같이 부딪히라고 말해주고 싶다. 세상 좋아졌다지만 아직도 차별 많고 무시가 일상이다. 그럴수록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혜택을 바라지 말고, 남들보다 뭐든 10배 더 노력해야 한다. 열심히 하면 주변에서 "같이 해보자"며 마음을 열고 도와준다. 한 번뿐인 인생, 남이 쉽게 내뱉는 "안 된다"는 말에 넘어가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 한다.

정년 이후의 삶? 정년은커녕 하루 앞도 생각 안 한다. 언제든 벽과 맞닥뜨리면 또 무식하게 열심히 하면 결국 길이 나올 거라는 걸 아니까. 죽을 만큼의 노력이 필요했을 땐 마음에 강철을 깔고 독한 마음을 먹었지만, 이젠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제보다 조금만 더 따뜻한 사람, 그래서 주위가 더 따뜻해진다면 그게 맞는 삶 같다. 그게 살아있는 이유 같다. 그 시절의 나처럼 희망 없이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 정말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손가락조차 못 움직이는 사람이 치과의사하고 서울대 교수도 한다는 걸.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사고로 인생의 바닥보다 더한 진흙탕에 떨어졌을 때 부모님은 "상태가 어떻고, 앞으로는 어떻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 " 이런 말을 아예 안 했다. 울지도 않았다. 지금도 똑같다. 사고 전이나 다를 바 없이 장애에 대해 아무 말 없이 뭐든 아들 결정을 묵묵히 존중해준다. 이제 7살이 된 딸을 낳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 부모님 속이 수백 번 찢어지고 울부짖으셨겠구나. 커가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 아빠,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 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