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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미술관, 경비원, 그리고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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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 그는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전시 관람객으로 간 게 아닙니다. 자신이 일하던 직장을 떠나 경비원이 되기로 했습니다. 요즘 서점에서 인기인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하 메트·MET)의 경비원입니다』(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죠. 저자가 미술을 공부한 학자나 큐레이터가 아니라 경비원이고, 더구나 그가 일했던 곳이 세계적인 미술관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원제가 『All the Beauty in the World』, 즉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인데, 번역서 제목에 ‘미술관’과 ‘경비원’을 나란히 내세운 출판사 전략도 흥미롭습니다.

김환기의 ‘달과 항아리’(1954). 리움미술관 소장품으로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국실 25주년 특별전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 MET]

김환기의 ‘달과 항아리’(1954). 리움미술관 소장품으로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한국실 25주년 특별전에서 전시 중이다. [사진 MET]

2008년 가을부터 5년 가까이 미술관에서 일한 저자가 쓴 이 책은 대략 세 겹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남들이 다 부러워할 직장 ‘뉴요커’에서 일하다가 형의 죽음을 겪고 갑자기 직업을 바꾼 자신의 사연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사랑한 미술 작품과 거기에서 얻은 통찰에 관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의 직장 미술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메트의 역사와 각자 푸른 제복 안에 다양한 사연을 감추고 있는 동료 경비원 이야기, 미술관 직원이 받는 복지 이야기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 세 번째 대목을 살짝 들여다볼까요. 저자에 따르면 메트는 매년 관람객 수가 거의 700만 명에 달하고, 경비원만 500명이 넘습니다. 뜻밖에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술관이 문 닫는 날, 즉 휴관일에 직원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미술관은 주중 하루 문을 닫는데요, 이런 날 직원들은 자기 손님을 한두 명 데려올 수 있다고 합니다. “큐레이터들이 고액 기부자와 VIP에게 미술관을 안내하는 동안 경비원과 청소부는 부모님께 호사스러운 투어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격주로 나오는 미술관 직원 소식지 ‘메트 매터스(MET Matters)’와 별도로 경비원들이 시와 산문을 쓰고 편집해 잡지를 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메트는 몇 년에 한 번씩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전시회를 열고 직원들이 작품을 출품하는데요, 여기엔 경비원들도 꽤 많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미술관 직원이 모두 예술에 관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통해 동료들이 ‘긍지 높은 경비원’임을 절감한다고 그는 썼습니다. 예술을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대하지 않는 미술관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은 미술관에서 아름다움과 우아함, 상실, 그리고 예술의 의미를 배우고 새 길을 떠났습니다. 미술관은 혹자에겐 영감을 찾기 위해 찾아가는 장소이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소중한 일터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미술관은 어떤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