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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선영의 마켓 나우

정책 허점 파고든 ‘전세 사고’ 1만9350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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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선영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박선영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내일은 전세 사기 피해자의 1주기다. ‘빌라왕’ 남모씨는 주택 2708채를 보유하며 453억 원에 달하는 피해자 563명의 보증금을 가로챘다. 세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주지 않은 전세금을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대신 변제해 주는 전세보증사고 규모가 1월 한 달 만에 30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사고액이 4조3347억원, 사고 건수는 1만9350건이다. HUG가 지난해 집주인을 대신해 세입자에게 내어준 돈은 3조5540억원에 달했다. 올해에는 집값 상승기에 체결된 전세계약의 만기가 돌아오기 때문에 전세보증금 반환사고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규모 사회 문제로 확대된 전세금 반환 시스템의 허점을 점검해야 한다.

마켓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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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과 김세직 서울대 교수의 2013년 논문 ‘Financing Growth Without Bank(은행 없는 금융의 성장)’이 정의하는 전세는 “은행의 개입 없이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계약”이다. 전세는 태생이 사적계약이자 P2P금융이다. 이러한 사적계약에 금융권이 ‘전세대출’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을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이다.

전세자금대출은 보증부대출이 대부분이다. 보증부대출은 금융기관이 ‘부동산 등의 물적 담보물’ 대신 ‘공적기관의 보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대출을 말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작년 기준 20개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은 170조원이고, 한국주택금융공사와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대출 보증잔액은 135조원이다. 전세대출은 세입자를 통해 사실상 은행이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적보증의 존재 때문에 집주인에 대한 신용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현재의 전세금 반환 사고를 초래했다.

‘서민주거 안정화’라는 선의로 시작된 전세대출과 전세보증은 분명 정부의 재정투입 없이 당장의 주거비를 절약해주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세입자에게 ‘조삼모사’다. 중장기적으로 전세보증의 존재는 가계부채인 전세대출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전세가격의 상승을 초래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집값을 밀어 올린다. 또한 전세보증금이 갭투자에 남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스템 위기가 아니라고 해서 기존 제도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급격한 금융부채의 증가는 과도한 자산시장의 버블을 야기한다. 많은 전문가가 주택시장을 왜곡하는 낮은 전세보증료율을 현실화하고, 전세보증 한도와 전세대출을 서서히 줄여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배수를 70배에서 90배로 상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박선영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