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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의 트라우마…파묘하고 싶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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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올해 최단 기간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는 장재현 감독이 실제 묘 이장 현장을 수십 차례 취재해 완성했다. [사진 쇼박스]

올해 최단 기간 2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는 장재현 감독이 실제 묘 이장 현장을 수십 차례 취재해 완성했다. [사진 쇼박스]

침체된 극장가에 “겁나 험한” 영화가 나왔다.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가 개봉(22일) 나흘 만에 229만 관객을 동원했다. 천만영화 ‘서울의 봄’보다는 이틀 빠른 200만 돌파다. “사전 예매율이 엄청나다. (차주 개봉작 ‘듄’으로 내한한 할리우드 배우) 샬라메가 쫄 것 같다”던 주연배우 최민식의 자신감이 현실이 됐다. 지난 25일 폐막한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부문 초청 후 겹경사다.

상업 데뷔작 ‘검은 사제들’(2014, 544만 관객)에서 가톨릭 구마의식, ‘사바하’(2019, 239만 관객)에서 신흥종교 비리를 파헤친 ‘오컬트 장인’ 장재현(43) 감독이 ‘파묘’에서 다시 전공 분야를 살렸다. 미국 LA의 갑부집 후손 박지용(김재철)의 의뢰로 조부 묘 이장에 나선 풍수사 상덕(최민식), 장의사 영근(유해진), MZ 무당 화림(김고은)·봉길(이도현)이 주인공이다. “묘 하나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상덕) 잘 아는 이들이 박씨 집안에 대물림된 악운을 끊으려다, 한반도 정기를 끊어 놓은 초자연적 존재인 ‘험한 것’과 맞닥뜨린다.

첫 주말부터 유튜브·SNS 등에선 영화 속 요소에 대한 해석 열기가 뜨겁다. 일제 강점기, 일제가 한국 땅에 쇠 말뚝을 박아 풍수지리적 맥을 끊으려 했다는 가설과 함께다. 최민식도 지난 22일 인터뷰에서 “대사로 나온 위도·경도 숫자를 맞추면 (한반도) 허리 지점”이라며 “한반도 기운을 끊는 주술적 행위를 뽑아내 상처를 치유한다는 게 영화의 정서”라고 설명했다. 네 주인공의 이름이 김상덕·고영근·이화림·윤봉길 등 실존 독립운동가와 같은 데다, 영근의 장의사 간판 ‘의열 장의사’가 항일 무장단체 의열단을 연상시킨다는 관객 풀이도 나왔다.

각본을 겸한 장 감독은 인터뷰에서 “풍수사들과 땅의 가치를 얘기하다 보면 매번 ‘쇠침’에 다다랐다. 우리 땅에 과거 상처와 트라우마가 많은데 발톱의 티눈을 뽑듯 파묘해 버리고 싶었다”면서도 “반일(反日)은 안 도드라지게 하려 했다”고 말했다.

무당 역의 배우 김고은은 실제 무속인의 자문을 받아 영화에서 굵직한 굿 장면을 소화했다.

무당 역의 배우 김고은은 실제 무속인의 자문을 받아 영화에서 굵직한 굿 장면을 소화했다.

캐스팅에 대해 “최민식 배우는 한국 대표 아버지이자 ‘라스트 맨 스탠딩(최후의 생존자)’ 같은 이미지가 영화와 맞았다. 시원찮은 묫자리에 십원 짜리 동전을 던지는 장면에서 동전 색깔이 잘 안 보여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백원 짜리로 바꿔서 찍었는데 그때서야 ‘명량’ 느낌이 있겠구나 떠올렸다”면서 “김고은 배우도 또래 중 대안이 없었다. 기독교인으로 알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파묘’는 장 감독이 어릴 적 고향 경북 영주 뒷산의 100년 된 무덤에서 굿판과 함께 묘를 파내는 걸 보고 충격받은 기억에서 출발했다. 기독교 신자지만,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속 신앙에 우리 역사·사회상을 녹여낸 그다.

‘검은 사제들’에선 구마 의식의 배경 지식부터 소개했고, ‘사바하’에선 종교 비리 폭로 전문 목사를 주인공으로,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고 보는 불교 교리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펼쳐냈다. ‘검은 사제들’에선 가톨릭 사제 캐릭터를 무속의 세습무·강신무 이야기를 풀어내 만들었다. ‘파묘’는 “무속신앙의 피날레”로, “아껴뒀던 무속 아이디어와 퍼포먼스를 쏟아냈다”는 설명이다.

‘파묘’에선 묫자리에 탈이 나 후손에 해가 미치는 걸 뜻하는 ‘묫바람’, 관 아래 관을 묻는 ‘첩장’ 등 전문 용어가 나온다. 돼지나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대살굿’, 신체를 떠난 혼을 불러들이는 ‘혼 부르기’, 빙의된 존재를 속여 정보를 캐내는 ‘도깨비 놀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무속 개념을 정교하게 그렸다.

장 감독은 “대살굿 할 때 화림이 칼로 몸을 긋고 얼굴에 숯을 바르는 것은 ‘내게 신이 들어왔나. 내가 지금 안전한가’ 확인하는 행위다. 굿 도중 피를 먹는 것도 몸에 들어온 신에게 밥을 드리는 것”이라며 “기존 작품들에선 무속 장면을 그냥 ‘멋’으로 찍을 때가 많은데, ‘파묘’에선 행위의 목적을 정확히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험한 것’의 실체도 미스터리에 머물지 않는다. 실제 배우 및 농구 선수의 신체·목소리를 동원해 명확히 구현했다. 밤하늘을 밝힌 거대한 도깨비불도 컴퓨터그래픽이 아닌, 가스 호스를 크레인으로 끌어올린 뒤 불을 붙여 구현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 관람객 평균 만족도는 95%로, “찝찝함 없이 깔끔하다” “무서운 것 없이 재밌다”는 호평이 “귀신의 실체가 뚜렷해 몰입을 방해한다” “스토리가 처진다”는 평가와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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