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러 제재에 포함된 韓기업 대표 "러시아와 거래한 적 없는데…"

중앙일보

입력

미국이 최근 러시아를 겨냥해 역대 최대 규모의 제재를 단행한 가운데, 제재 명단에 포함됐던 한국 기업의 대표는 "러시아와 거래한 적이 없으며 제재 위반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기업은 CNC(컴퓨터 수치 제어) 기계를 판매하는 곳으로 주로 인도에 수출했다고 주장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대러 제재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대러 제재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인도 등에 기계 팔았을 뿐"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정부의 제재 명단에 오른 한국 기업 한 곳은 경남 김해시 소재의 대성국제무역(Daesung International Trading)이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해당 기업 등 제재 대상 업체들이 "미국산 공작 기계, 전자 시험 장비, 공작 기계 부품 등을 BIS의 허가 없이 구해 러시아 산업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발표된 미국의 신규 제재 대상은 전 세계 500곳이 넘는다.

대성국제무역의 대표인 파키스탄 국적의 하산 씨는 25일 오후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제재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기자로부터) 처음 들었다"면서 "한국 정부 등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정착한 지 오래됐고, 그간 기계 품목을 세관에서 전략 물자 허가를 받아 인도 등에 주로 수출해왔다"고 설명하면서 "러시아와 거래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러시아 대사관 인근에 최근 숨진 러시아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와 관련해 "나발니는 살해됐다"는 문구가 쓰인 추모 포스터가 붙어 있다. EPA. 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러시아 대사관 인근에 최근 숨진 러시아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와 관련해 "나발니는 살해됐다"는 문구가 쓰인 추모 포스터가 붙어 있다. EPA. 연합뉴스.

대성국제무역이 취급한 CNC 기계는 컴퓨터 제어를 활용해 제품을 정교하게 제조하는 데 사용된다. 무기 제작에도 활용될 수 있어 전략 물자로 지정돼 있다. 전략물자란 대량살상무기(WMD), 미사일, 재래식 무기 등의 제조·개발·사용에 활용될 수 있는 민군(民軍) 겸용의 이중 용도 품목으로 수출을 위해선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다.

앞서 지난 1일(현지시간)에는 미국의 주요 우방인 대만의 한 민간 기업이 2000만 달러 분량의 CNC 기계를 러시아에 수출했다는 워싱턴포스트 보도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미 상무부는 대성국제무역을 제재하며 "미국 수출관리규정(EAR)에 해당하는 모든 품목에 대해 '거부 원칙'(policy of denial)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해당 기업이 미국산 부품이 들어간 제품을 더는 수출입할 수 없도록 자동으로 허가를 거부하는 조치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지난 23일(현지시간) 공개한 우려 거래자 목록(Entity List)에 등재된 한국 기업 대성국제무역(Daesung International Trading) 관련 대목. 미 상무부.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지난 23일(현지시간) 공개한 우려 거래자 목록(Entity List)에 등재된 한국 기업 대성국제무역(Daesung International Trading) 관련 대목. 미 상무부.

"관계 당국 조사 착수" 

미국의 발표 이후 정부 차원에서도 조사에 착수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이번에 미국의 우려 거래자 목록(Entity List)에 등재된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미국 측과 사전에 정보를 공유했으며, 우리 관계 당국에서도 관련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조만간 관계당국이 기업 관계자를 직접 조사할 거란 관측이 나온다.

"인도 등에 판매했던 기계가 러시아로 흘러 들어간 줄은 몰랐다"는 대성국제무역 측 주장처럼 앞서 다수의 한국 업계 관계자들도 제재 위반에 의도치 않게 얽혔다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에 이미 판매한 품목의 최종 목적지를 추적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었다. 주로 대북 제재와 관련해 불똥이 튀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엔 러시아의 제재 회피 수법도 날로 고도화하면서 관련 위반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다만 제재는 '제재 대상과 잘못 얽혔다가는 알았든 몰랐든 처벌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한다. 미국의 독자 제재는 '주의 의무(Due diligence)'를 규정하고 있는데 '제재 대상자와 연루되는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뜻이다. 또 다른 규정인 'KYC(Know Your Customer·네 고객을 알라) 또한 거래 상대자가 제재 위반에 해당하는 네트워크에 있는 것은 아닌지 미리 잘 살피라는 취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성당을 찾은 모습. 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성당을 찾은 모습. AP. 연합뉴스.

사전 주의·정부 계도 필요 

미국의 대러 제재가 전방위로 단행되는 가운데 위반 사실을 설사 몰랐더라도 면죄부가 되지 않는 만큼 한국 기업과 개인이 추가로 연루되지 않도록 민간의 각별한 주의와 정부의 적극적인 계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지난해 12월에는 미 재무부가 러시아의 군사 물자 획득을 도운 1962년생 한국인 이 모 씨를 제재한 바 있다. 다만 이 씨의 경우 미국의 제재 전 한국 관계 당국에서도 대러 불법 우회 수출 혐의로 조사하던 인물이다.

한편 미 정부의 이번 제재 대상에는 한국인이 창업한 아일랜드 더블린 소재의 반도체 부품·장비 기업도 포함됐다고 한다. 23일 미 재무부가 발표한 제재 명단에는 '큐빗 세미컨덕터'라는 기업이 전자 부품을 제재 대상인 러시아 반도체 기업 'JSC 미크론'에 수출한 혐의 등으로 포함됐다. 이와 관련, 24일 아일랜드 일간 아이리시 타임스는 "회사 창업자를 포함해 큐빗 경영진 두 명이 한국인"이라고 보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