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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소주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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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30면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소주병』 (실천문학사 2004)

아버지는 자주 소주를 마셨다. 저녁밥을 먹으며 반주를 즐겼던 것. 한 번에 반 병씩만 마셨다. 그러니 집 냉장고에는 늘 열지 않은 소주가 있거나 반 정도 남은 소주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남은 소주를 잘 보관하는 데에는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처음 따개로 병뚜껑을 열 때 최대한 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다시 꼭 닫아둘 수 있으니까. 소주 맛을 알기도 전에 나는 이 기술 아닌 기술을 먼저 터득했다. 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아버지가 소주 한 병을 빠르게 비웠다. 아직 냉기가 남아 있는 소주병의 겉면에는 눈물 같은 물방울이 미끄러져 내렸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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