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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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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23면

[근현대사 특강] 동학 농민군의 항일투쟁

약 2개월 머문 일본공사관에서 나올 때 찍힌 ‘녹두’ 전봉준. 다리 부상으로 담가에 실렸다. 일본 종군 사진사(村上天眞)가 전봉준의 허락을 받고 찍었다고 한다. 호송하는 조선 순사 2인에게서 ‘범인’ 전봉준에 대한 경계심을 찾아볼 수 없다. [사진 『조선왕비살해와 일본인 』(김문자·일문)]

약 2개월 머문 일본공사관에서 나올 때 찍힌 ‘녹두’ 전봉준. 다리 부상으로 담가에 실렸다. 일본 종군 사진사(村上天眞)가 전봉준의 허락을 받고 찍었다고 한다. 호송하는 조선 순사 2인에게서 ‘범인’ 전봉준에 대한 경계심을 찾아볼 수 없다. [사진 『조선왕비살해와 일본인 』(김문자·일문)]

청일전쟁 중 동학 농민군 항쟁은 ‘또 하나의 전쟁’으로 불릴 만큼 치열했다. 지금까지 그 항쟁은 안으로는 양반 중심 사회체제, 밖으로는 외국 자본주의 침략에 대한 것으로 규정해 왔다. 좌파적 표현을 빌리면 “반침략 반봉건을 전제로 결집하여 반제국주의 반(反)개화파적 입장에서 혁명적으로 전쟁을 확대 발전시켜 간 것”이었다. 좌우 어느 쪽이나 관군이 일본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진압한 점을 강조했다. 1997년 나카스카 아키라 교수가 ‘은폐된 역사’로서 일본군의 ‘조선왕궁 점령’ 사건(1894.7.23.)을 밝히기 전에 확립된 해석이다. 2015년 조재곤 박사는 나카스카 교수의 ‘발견’ 곧 ‘일본군 왕궁 점령’ 사건이 준 사회적 충격에 관한 내외의 기록을 조사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여기서 조사된 결과는 지금까지의 동학 농민군 항쟁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다. 이를 참작하여 실황을 살펴본다.

1894년 7월 23일 야반 일본군의 궁궐 침범 소동 소리에 왕과 왕비는 거처인 건청궁에서 나와 근정전 쪽 함화당에 머물렀다. 일본군이 닥쳐 호위 병력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임금은 앞으로 나서 내 병사에 손대지 말라고 호령했다. 너희 공사관에 우리 대신이 갔으니 물러나라고 호통쳤다. 나카스카 교수는 자신이 처음 발견한 ‘은폐된 원고’에서 이 부분을 읽고 ‘무능한 군주’ 고종이란 인식을 거두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의병과 달리 양반 지휘 안 받아

이틀 뒤 7월 25일 청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일본군은 부산, 인천, 원산, 진남포 등지에 상륙하여 전국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일본군 측 기록은 “일본군의 살기로 조선인들은 산과 섬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라고 하고. 우리 측 기록도 “명문대가 가족들이 모두 피란하여 도성을 빠져나가 민심이 들끓었다”라고 하였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7월 사태’로 서울은 철시와 물품 품귀가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당시의 식자들은 임진왜란을 방불케 하는 이 상황을 ‘갑오 왜란’이라고 불렀다. 최근 ‘청일전쟁’ 대신 이 단어를 직접 서명으로 붙인 연구서도 나오고 있다.

법정 심문 기록 『전봉준 공초』(1895. 법부).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연구원]

법정 심문 기록 『전봉준 공초』(1895. 법부).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연구원]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은 ‘갑오년 오시마(大鳥·여단장)의 난’은 독립을 앞세운 강탈이라고 비난했다. 9월부터 안동, 상원, 춘천 등지 유림이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300년 전 임진왜란 때와 달리 평민 백성들은 양반 유생들의 지휘를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학 농민군 스스로 항일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1894년 5월 1차 봉기 때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낸 ‘무장(茂長) 포고문’은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우리에 대해)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면서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는 악한 신하들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왕은 사대부 양반의 우두머리로 타도의 대상이라는 좌파의 계급 사관 통설과는 크게 다른 인식이다. 조선 후기 영·정조 이래 조선의 ‘소민 (평민)’은 왕의 비호 아래 ‘대민(사대부)’과 동등한 나라 주인의식을 가지는 존재로 바뀌고 있었다. ‘무장 포고문’의 국왕에 대한 신뢰는 이의 소중한 결실이다. 고종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대 왕들의 ‘소민 보호’ 노선을 지켰다. 1893년 동학교도 보은 집회 때 한 신하가 ‘토벌’을 주장하자 고종은 “동학교도도 내 백성인데 어찌 토벌한다는 말인가”라고 힐책했다.

‘교육조령’의 4면. [사진 『관보』]

‘교육조령’의 4면. [사진 『관보』]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적으로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대한 항거였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도 동학 농민군은 바로 움직였다. 7월 말부터 전라도의 일부 집강소는 다시 일어나 한성으로 가서 왕을 지키고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을 축출해야 한다는 의론을 일으켰다. 호남 유생 황현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전봉준 지도부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7월 보름(음력) 즈음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남원에서 집회를 주관하여 수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전봉준이 각 읍에 지휘부로 도소(都所)를 설립하고 집강(執綱)을 뽑아 수령의 일을 대행하라고 명령하였다. 또 전라 감사 김학진의 군관 송인회가 와서 감영의 뜻을 전달하자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처리하자고 약속했다고 했다. 동학 농민군 조직은 조선 후기 농업 경제 발전과 함께 발달한 농촌 공동체 위에 서 있었다. 협업을 중시한 공동체 의식은 탐관오리 수탈에 분노했지 왕을 적으로 보는 계급의식에 빠져 있지 않았다. 유림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호남에서 농민 공동체는 동리마다 모정(茅亭) 회의를 통해 자율성을 더 발휘했다.

11월 19일(음력 10월 22일) 전봉준의 전라도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격전 끝에 패한다. 이후 전봉준은 남쪽으로 이동해 일본군의 ‘모조리 섬멸 작전’(2024.1.13. ‘근현대사 특강’)에 밀려 내려온 충청도 농민군과 합세하여 싸우다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고 해를 넘겨 1895년 1월 2일 서울 일본 공사관에 도착해 4차에 걸친 심문을 받는다. 이 심문에서 그는 왕궁 점령 사건이 2차 봉기의 원인임을 아래와 같이 거듭 밝혔다.

“8월 17일(양력) 궁궐 침범 소식과 관련해 무주 집강소 앞으로 통문을 보내 왜구가 국왕을 욕보였으니 우리는 마땅히 목숨을 걸고 의(義)로서 싸우기를 결심했다. 그러나 자칫 그 화가 종사(왕실)에 미칠지 몰라 물러나 시세를 관망하기로 한 뒤, 9월 말 ‘평양전투’ 후 지도부가 다시 의논을 내기 시작해 10월 하순 충청도 동학 농민군의 거사를 보고 11월 초 삼례역에 4000여 명이 모인 뒤 북상하여 제2차 봉기를 시작했다. 우금치 패퇴 후인 12월 8일(양력)에 정부군, 지방 감영 병사 및 이서(吏胥), 상인 등에게 보내는 ‘고시’에서 ‘개화 간당’이 일본 군부와 결탁한 것을 비난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마주한 관군에 대한 비난이었다. 전봉준은 그 관군이 국왕이 아니라 김홍집의 ‘개화 간당’이 보낸 것으로 간주했다.

고종, 일본군 감시 뚫고 동학군에게 밀지

광화문을 지키는 일본군. [사진 『경성부사』 4권(1936·일문)]

광화문을 지키는 일본군. [사진 『경성부사』 4권(1936·일문)]

일본군 인천 병참 부대의 『진중일지』는 9월 23일 본국 대본영으로부터 동학 농민군 지도자를 잡아 포박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바로 충주 지역 가흥 병참대로 가서 국왕이 보낸 선무사(宣撫使)를 만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무사 자신은 농민군 수령들에게 온건한 행동을 선유(宣諭)하고 있으니 일본군은 이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멈추라고 했다. 『일지』는 선무사의 배후에 충청도 동학 농민군 조직이 있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의견을 붙였다.

동학 농민군에게 국왕이 밀지를 보낸 것도 주목할 사실이다. ‘왕궁 점령’ 후 오시마 여단의 정예 이치노헤(一戶) 대대(일명 전선 옹호대)가 경복궁 앞 조선 전보총국 일원에 상주하였다. 이를 뚫고 왕의 밀지가 밖으로 나갔다. 이용호, 송정섭, 윤갑병, 이건영 등 밀사 이름이 조선, 일본 양측 기록에 남아 있다. 왕이 궁 안에 갇히다시피 한 상황 때문인지 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 봉기를 종용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종실록』에 밀사를 문제시한 기록은 모두 총리대신 김홍집의 의정부가 낸 것으로 확인된다. 시기도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부임한 11월이다. 일본 공사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총리대신 김홍집이 이노우에 공사의 항의성 단속을 대행한 것이 분명하다. 동학 농민군은 스스로 ‘보국안민’의 주체를 자부한 만큼 왕의 밀지가 없어도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위와 아래가 하나가 된 나라 지키기 항쟁이었다.

전봉준의 신병은 2월 27일 조선 정부 법무아문으로 넘겨진다. 그사이 2월 23일 고종은 국한문 혼용체의 ‘교육조령(詔令)’을 반포한다. 덕·체·지 3양(養)의 실용 신교육으로 “나라의 분개를 풀어줄, 나라의 모욕을 막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국민을 창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2024.2.3. ‘근현대사 특강’) 동학 농민군의 피나는 항쟁에 대한 군주의 엄숙한 보답 표시였을까? 소학교, 사범학교, 외국어학교, 기술학교 등의 설립 ‘조령’이 뒤를 이어 백성이 국민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나 고종 정부는 전봉준 등의 목숨을 보전해 주지 못했다. 전봉준 석방은 일본군에게 재차 군사행동의 빌미를 줄 위험성이 높았다. 8개월 뒤 왕실이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자 왕비 시해의 보복을 받지 않는가? 4월 23일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 5명은 법무아문 임시 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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