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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의 노예’ 도스토옙스키 구원한 건 아내의 온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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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22면

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카드놀이하는 사람들(Les Joueurs de cartes)’. 폴 세잔.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카드놀이하는 사람들(Les Joueurs de cartes)’. 폴 세잔.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을 현대화시키면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 쯤 될 것이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일상이 되어버린 접속은 인간관계, 소통, 업무, 콘텐트 소비 방식 등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어느새 최소한의 접촉마저 필요 없는 비대면 사회를 등장시켰다. 접속만 하면 얼마든지 관계를 맺고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마련된 것이다.

문제는 ‘접속’이 불러오는 ‘중독’이다. 영국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은 하루 평균 3시간 15분을 스크린 타임에 할애하고, 24시간 동안 2617번 스마트폰을 만진다. 어딕션(addiction) 즉 중독의 어원은 ‘addicere’인데 라틴어로 ‘∼의 노예가 되다’ ‘사로잡히다’라는 의미다. 고대 로마에서는 ‘중독자=노예’와 같은 뜻이었다.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하면 그 집의 노예가 되어 채무가 탕감될 때까지 노역을 살게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굴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알코올, 마약, 도박, 스마트폰, 숏폼, 게임, 쇼핑 등 말초적 쾌락을 자극하는 유혹에 사로잡혀 디지털 기기의 자발적 노예가 된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고흐는 70도 독주 ‘압생트’에 중독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70도 가까운 독주 압생트에 중독된 것으로 유명하다. 독주는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그의 정신세계를 더욱 어지럽혔고,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묵시론적인 종교주의자, 철학가, 비평가, 저널리스트, 심리 분석가, 사상가, 예언가라 불리는 위대한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또한 자기파괴 대마왕이었다. 그를 파괴의 지름길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도박. 1863년 8월 당시 연인이었던 아폴리나리야 수슬로바를 만나러 가던 길, 독일 비스바덴 카지노에서 1만 프랑을 넘게 딴 게 문제였다. 그가 명성을 얻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빚더미에 앉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으로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글을 썼다. 출판사에서 받은 선불금을 해결하기 위해,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사망한 형이 남긴 채무자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형의 유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망한 첫 번째 부인이 남긴 망나니 의붓아들을 책임지기 위해 날마다 빈 페이지를 채워나가야 했다. 당시 러시아 출판사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책정했기에 그는 한 줄이라도 더 길게 쓰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4대 장편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내 안나 스니트키나의 초상. 작자 미상.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의 아내 안나 스니트키나의 초상. 작자 미상.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그런데 몇 천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이 대작들이 퇴고 없이 나온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그렇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단 두 편을 제외한 그의 모든 작품이 퇴고 없이 출판사로 넘겨졌다. 빚과 마감에 쫓겨 퇴고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나, 톨스토이 등 동시대 작가들이 퇴고에 퇴고를 거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보며 그는 종종 글 쓰는 노동자인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1865년 여름 도스도옙스키는 함께 잡지를 만들던 친형 미하일이 사망 후 남긴 빚 때문에 채권자들에게 엄청난 시달림을 받는다.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출판사들에 선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그런데 야비하기로 소문난 출판업자 스텔롭스키라는 사람만이 3000루불이라는 엄청난 선금을 제안한다. ‘1866년 11월 1일까지 완성된 원고를 전달하지 못하면 기존 작품과 더불어 앞으로 9년 동안 쓰는 모든 작품의 판권 및 인세를 출판사에게 양도한다’라는 조항이 붙은 악마의 계약서와 함께.

『도박사』 초판 속표지.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도박사』 초판 속표지.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돈이 급했던 도스토옙스키는 말도 안 되는 이 계약서에 서명한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스텔롭스키와 약속한 날짜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은 구상만 했을 뿐,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상태다. 이때 절망에 빠진 그의 눈앞에 스무 살의 속기사가 구원자로 등장하는데 그녀가 바로 안나 스니트키나다. 그가 26일간 구술하고 안나가 속기하여 원고 마감일 하루 전인 1866년 10월 30일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도박사』다. 이 작품은 도박 중독자 도스토옙스키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인공 알렉세이는 독어, 불어, 러시아어 등 3개 국어가 능통한 귀족 지식인이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기력감에 빠져산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 폴리나로부터 ‘룰렛으로 한 밑천을 잡을 것이니 도박을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알렉세이는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폴리나의 근거 없는 믿음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비유한다. 더 나아갈 곳 없는 자, 벼랑 끝에 선 사람만이 운에 대한 실험을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물에 빠진 사람이자, 벼랑 끝에 선 인간이었다. 다른 선택권이 없던 그는 폴리나의 명령대로 도박장을 찾고, 첫 판에서 엄청난 돈을 딴다. 무서운 파국으로 향하는 서막의 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인간성과 자존감마저 상실한 그는 도박이라는 이름의 악마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 파멸에 이르고 만다.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사』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비스바덴의 카지노 쿠르하우스.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가 『도박사』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비스바덴의 카지노 쿠르하우스.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이 파멸의 길을 걷는 또 한 사람이 바로 도스토옙스키다. 『도박사』 출간 후 1년 뒤, 악마의 계약서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스무 살의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와 결혼하지만 그의 생활은 나아진 게 없었다. 그녀는 돈을 뜯어내려는 친척들과 빚쟁이들의 독촉에서 그를 구해 내기 위해 결혼과 동시에 외국으로 터전을 옮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빚쟁이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노름벽이었다.

1872년  『악령』을 집필할 당시 그의 도박 중독은 거의 파괴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스토옙스키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보다 못한 경제관념을 가진 남편을 대신해 현실에 두발을 딱 붙이고 상황을 정리해나간 결과 만년의 그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삶을 선사한다. 생애 처음 안정된 환경에서 쓴 소설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를 도박이라는 중독에서 구원해준 것은,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은 안나, 그를 비난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안나의 연민과 사랑이다.

1980년 캐나다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헤로인 중독에 관한 연구를 보던 중 ‘우리에 갇힌 쥐에게 모르핀 희석액과 물을 함께 주면 희석액에 중독되어 죽는다’라는 내용을 발견한다. 마약 중독자 치료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던 그는 ‘지금껏 내가 본 중독자들은 외롭고 사회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 쥐들도 비좁은 우리에서 고립되어 있었기에 쉽게 중독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안정 찾고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행복한 쥐 공원’을 조성한다. 다양한 먹거리와 놀이 기구가 놓인 쾌적한 환경의 공원을 만든 후, 여러 마리가 자유롭게 어울리며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쥐들의 약물 섭취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를 본 일부 과학자들은 쥐들이 애초 약물에 중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섭취량이 적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그는 57일 동안 쥐들에게 모르핀 희석액을 강제로 투여한 후 이를 다시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실험을 재개한다. 첫 번째 그룹의 쥐들은 좁고 어두운 우리에 고립시켜 두었고, 두 번 째 그룹 쥐들은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 공원에 풀어 놓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우리에 갇힌 쥐들은 약물에 집착했지만 공원에 놓인 쥐들은 모르핀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섭취량도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사랑이다. 도스토옙스키를 구원해준 것도 그가 그렇게 간절히 닿기를 원하던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안나의 따뜻한 온기였다. 모르핀에 중독된 쥐들을 해방시켜 준 것 또한 전문가의 손길이 아닌 안정적 환경과 사회적 연대였다. 36.5도의 온기 가득한 만남은 사라지고 용건만 간단히 전달하는 텍스트 위주 대화가 중심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허한 위로와 넋두리로 가득한 ‘접속’이 아니라, 눈에서 눈으로, 입에서 입으로 다정함을 전할 수 있는 있는 ‘접촉’이다. 누군가의 체온이 필요한 날 “차 한잔 마실까?”라고 전화할 상대가 없다면, 그 많은 온라인 친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정아 번역작가·CEO. 노문학 박사. 낮에는 패션회사 스페이스 눌의 대표로, 새벽에는 도스토옙스키 번역가로 일한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단일 번역가 번역이라는 세계 최초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완역본이 출간됐고, 현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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