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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카페·공원엔 남자 무리…베트남 전쟁이 남긴 짠한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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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0년째 신혼여행 ⑩ 베트남 하노이

하노이 바딘 광장의 호찌민 묘소. 베트남의 국가 영웅 호찌민이 잠든 장소로, 근위병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다. 묘소 옆에 호찌민 박물관도 있다.

하노이 바딘 광장의 호찌민 묘소. 베트남의 국가 영웅 호찌민이 잠든 장소로, 근위병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다. 묘소 옆에 호찌민 박물관도 있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 흔히 받는 오해라 이제는 애써 변명하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1년에 석 달은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한다. 지금까지 48번의 한 달 살기를 경험했고, 심지어 2년 동안 세계여행을 한 적도 있다. 독자를 더 헷갈리지 않게 하려면 이쯤에서 그 비결을 밝혀야겠다.

아내의 여행

19세기 프랑스 식민 시대에 지어진 성 요셉 성당.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 닮은꼴이다.

19세기 프랑스 식민 시대에 지어진 성 요셉 성당.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 닮은꼴이다.

베트남처럼 물가가 저렴한 나라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나는 베트남에서도 지갑을 쉽게 열지 않았다. 한 달 살기는 장기전이다. 당연히 하노이에서도 현지 사정에 맞춰 생활비 규모를 잡았다. 한 끼 평균 밥값이 한국은 1만원이고, 베트남이 200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나는 메뉴 가격에 다섯 배를 곱해 지출 여부를 결정한다. 저렴한 물건에 현혹되지 않는 나만의 노하우다.

특급호텔 대신 복층의 저렴한 아파트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특급호텔 대신 복층의 저렴한 아파트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48번의 한 달 살기가 가능했던 건 깐깐한 소비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행 시점은 휴가철처럼 특정한 시기를 고집하지 않고 가장 항공권이 저렴한 달에 맞추는 편이다. 숙소는 정해둔 예산 안에서만 찾는데, 호텔보다는 현지인의 집을 빌리는 쪽이 더 저렴하다. 예약 전 집주인과 한 번 더 가격 협상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숙소는 대개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이 몰려 사는 어디쯤이 된다. 우리가 하노이에서 머문 숙소 역시 도심에서 살짝 비켜난 지역의 낡은 아파트였다. 다행히 500달러(약 66만원)가 안 되는 돈으로 복층 집 전체를 빌릴 수 있었다.

노점의 쌀국수는 한국 돈으로 2000원 정도다.

노점의 쌀국수는 한국 돈으로 2000원 정도다.

현지인처럼 살아보기. 한 달 살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켜온 모토다. 사실 경비가 충분하지 않아 ‘정신 승리’ 차원에서 떠올린 말인데, 몇 년 뒤 어느 공유 숙박 기업에서 광고 문구로 사용하는 걸 보고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러니 영 궁색 맞은 표현은 아니었나 보다. 근사한 레스토랑 대신 로컬 식당에서 밥을 먹고, 택시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스타벅스 대신 커피 노점을 이용하고 무엇보다 가이드 대신 현지 친구를 만드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현지인처럼 살아보기’다.

우리의 ‘짠내나는’ 여행 방식이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한 달 살기를 경험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현지인처럼 살아보자. 돈으로 환산 못 할 값진 여행의 묘미가 거기에 있다.

남편의 여행

새를 보며 여유를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

새를 보며 여유를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

2020년 2월 하노이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그곳에서 우리의 일상은 보통 이렇게 흘러갔다. 아침이면 노점에서 ‘반미(베트남식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고, 로컬 카페로 간다. 그리고는 다른 손님 틈에 끼어서 베트남식 커피 ‘카페 쓰어다’를 주문한다. 잔 밑에 깔린 연유를 천천히 풀면서 오늘 갈 곳을 정한다. 며칠쯤 이 생활을 반복하니 목욕탕 의자에 줄지어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 생경한 풍경 속에 자연히 녹아들 수 있었다.

하노이 명물로 통하는 길거리 이발소.

하노이 명물로 통하는 길거리 이발소.

‘왜 베트남 카페엔 남자밖에 안 보이지?’ 하루는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그런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광경이 또 있었다. 집 앞 공터를 지날 때면, 새장을 줄 위에 걸어 두고 온종일 ‘멍 때리고 있는’ 남자 무리를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세상 근심 걱정 없는 듯한 표정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걸 바라보는 잉여로운 삶이라니!

반면 우리의 일상은 바쁘게 흘러갔다. 철길 옆에 위태롭게 자리한 ‘하노이 기찻길 마을’에도 가고, 화장(火葬)을 바랐으나 영원히 죽지 못하도록 방부 처리된 호찌민 주석의 묘소에도 들렸다. 300여 개 호수를 안고 있는 하노이에서 가장 큰 서호를 유람하고, 프랑스 식민 지배의 흔적이 서린 성 요셉 성당,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도 구경했다.

공원에서 철봉 운동을 하는 남성들. 하노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공원에서 철봉 운동을 하는 남성들. 하노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숨 가쁜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올 때면 늘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집 앞 공원은 늘 철봉 운동을 하는 남자들로 가득했다. 웃통을 까고 근육을 뽐내며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카페와 공터에서 봤던 남자들이 다시 생각났다.

현지인의 삶에 들어가 보는 우리 여행은 대체로 이런 궁금증과 함께한다. 역사적 맥락, 지리적 위치, 기후의 영향 등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사정을 살피는 거다. 그래야 ‘베트남은 큰 전쟁의 여파로 남자를 귀히 여기는 풍속이 여전하다’는 걸 알게 된다. 오전 내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생기 없는 눈빛으로 새장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들의 사정을 그래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이들에게 “5성급 호텔에서 근사한 조식을 먹고 수영장에서 놀면서 지내다 왔다”라는 후기를 자주 듣는다. 아마도 그들은 카페나 공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진짜 하노이 남자들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을 거다.

☞하노이 한 달 살기 여행정보 · 비행시간: 4시간 30분 · 날씨: 겨울 추천(11~3월) · 언어: 베트남어(영어가 안 통하는 곳도 많으니, 생존 베트남어를 외워 갈 것) · 물가: 주머니 사정에 맞출 수 있음. 저렴한 2000원짜리 쌀국수도 맛이 탁월하다 · 숙소: 500달러 이하(집 전체 빌라 또는 콘도)

김은덕·백종민

김은덕·백종민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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