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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는 입학생 아닌 졸업생으로 승부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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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무전공 개혁 선봉 유홍림 서울대 총장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무전공 선발 확대와 융합형 학제 개편 등 주목할만한 개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유홍림 서울대 총장을 만나 2시간 동안 속내를 들었다. 그의 개혁안은 교육·학문적 차원을 넘어 인구 소멸과 대결 정치 등 ‘수축 사회’의 불길한 징후에 휩싸인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국가적 고려가 깔려 있었다. 플라톤·아카데미 등 본인이 전공한 서양정치 사상의 밈(meme)이 대화 내내 등장한 인터뷰는 19일 서울대 총장실에서 진행됐다. 유 총장은 지난 1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4년 학제를 5~6년 학·석사제로 바꿔야 융합형 인재 양성
무전공 도입해도 밀착 지도하면 쏠림 현상 방지할 수 있어
일본, 대학에 10조엔 투자…정부도 연구 펀드 조성해야
쪼그라든 나라 살리려면 학문 공동체 등 중간영역 살려야

청주 출신인 유홍림 총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박사를 받고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를 지내다 지난해 총장에 당선됐다. 온화한 성품 속에 강한 추진력을 겸비한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을 받는다. 김경록 기자

청주 출신인 유홍림 총장은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박사를 받고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를 지내다 지난해 총장에 당선됐다. 온화한 성품 속에 강한 추진력을 겸비한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을 받는다. 김경록 기자

융합형 인재 배출이 대학의 소명

취임 1년 소회와 향후 구상은.
“취임사에서 ‘이제 서울대는 입학생이 아니라 졸업생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했다. 원고에 없었지만 중요한 얘기여서 현장에서 말한 것이다. 르네상스·산업혁명 등 대전환기엔 늘 대학의 역할이 있었다. 지금도 격변의 시대다. 내년 종합화 50년을 맞는 서울대는 격변기에 소명을 다 할 융합형 인재를 배출할 역량을 구축해야 한다. ‘대전환 시대를 이끄는 학문 공동체’를 비전으로 정하고 12개 과제를 구체화했다. 그 첫째가 융·복합적 인재 양성이고 둘째가 과학기술의 가치 창출이다. 서울대는 종종 국민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서울대에 대한 기대의 반증 아닐까.”
학생 이전에 교수들이 융합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교수가 개별 학과를 넘어 대학원·단과대학에 소속될 수 있도록 학칙 6조를 개정했다. 대학 교육의 초점은 지식 전수가 아니라 역량 강화다. 지금 같은 융합의 시대엔 학문 간 ‘공통의 핵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1·2학년생을 ‘학부 대학’으로 묶어 다양한 전공을 공부케 하고 ‘교양’도 공통 핵심 역량 과목들로 바꾼다. 수업도 여러 분야 교수들이 들어와 학생들 앞에서 토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답이 없는 질문을 융합식으로 탐구하는 ‘팀 티칭’이다. ‘저출산’이라면 인구학·경제학 외에도 여성학·교육학·복지학 등 저출산 원인을 달리 보는 여러 분야 교수들이 토론을 벌인다. 학생들은 ‘이렇게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구나’라고 깨닫고 대안을 찾게 된다. 교수들도 서로에게 자극받기에 적극적이라 ‘팀 티칭’ 강좌는 많이 준비돼있다. 물리학·독문학·음악학 교수가 참여하는 ‘과학·음악·문학의 만남’이 있고 행정학·농학·미술학 교수의 ‘데이터로 디자인하는 리더십’도 있다. 리더십 연구에 미대 교수가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할 터다. 개인의 요구를 공공의 관심사로 제도화하는 게 리더십인데, 지식만이 아니라 감각도 필요하다. 이 강좌에선 매핑 데이터를 활용한 시각 디자인을 통해 그런 ‘감각’을 제시한다. 이런 게 융합이다.”

서울대 면접은 정답 아닌 역량이 척도

학부 대학을 마친 학생들이 인기 학과에만 쏠릴 것이란 우려는?
“서울대가 10년간 자유전공학부를 운영한 결과 입학할 때 꿈꾼 전공이 다른 전공으로 전환되는 경향이 분명히 발견됐다. 학부 대학에서 밀착 지도를 확대하고, 기숙 대학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 잠재력과 다양성이 함양돼 쏠림을 막을 수 있다. 이미 다전공 학생이 30%를 넘고, 4년 만에 졸업하는 이는 거의 없다. 졸업에 필요한 130학점을 넘겨 150~160학점을 듣는 학생이 많고 200학점 듣는 이도 있다. 1개 전공으로 평생 갈 수 없다는 걸 학생들이 먼저 아는 거다. 융복합 시대엔 제너럴리스트로 시작해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5~6년 학제로 바꿔야 한다. 다만 기존 전공들을 짜 맞춰 다전공을 하는 건 한계가 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모노 스피커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스테레오는 안된다.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게 전공 융합·대단위화다. 학생 혼자 하긴 어려우니 교수들의 밀착 지도가 필요하다.”
응시생 면접을 1시간 넘게 하는 하버드대처럼 면접을 강화할 뜻을 내비쳤다. 면접관이 된다면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예시만 들겠다. 단, 이 문제를 내겠다는 건 전혀 아니다. 미국 미네르바 대학의 첫 번째 질문이 ‘Who are you? (너는 누구냐)’더라.  한두쪽짜리 자기소개서 갖고 답할 질문이 아니다. 이렇게 미래에 닥칠 질문들은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 학생의 종합적인 잠재력 측정이 (면접의) 척도다. 즉 서울대 면접은 정답이 아니라 역량을 본다.”
의대 열풍을 막으려면 국가 차원에서 이공계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했다.
“맞다. 이공계에 주어진 병역특례가 효과적이었다. 이제는 4년 전액 장학금에다 생활비 및 석사 학위 비용까지 제공해야 한다. 재원이 문제인데, 2015년 도쿄대 등 4개 대학에 정부가 1조엔을 투자한 일본에 주목한다. 일본 대학은 우리보다 더 보수적인데도 기업과 연계해 산학 생태계 구축에 성공했다. 커리큘럼 설계까지 기업과 같이한다. 최근엔 10조엔 펀드로 확장했다. 무작정 주는 게 아니고, 경쟁을 시킨다.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는 자체 펀드가 60조원이 넘으니 100개 중에 하나만 성공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과감한 투자를 한다. 일본 대학은 그럴 돈이 없으니 정부가 개입해 성공한 것이다. 우리 정부도 여러 대학이 참여하는 대형 펀드를 조성하고 서울대에 허브를 맡겨야 한다. 우리 이공계의 몰락은 IMF 외환 위기 때 연구원들이 대량 실직한 탓이다. 따라서 이공계 인력이 평생 일할 수 있게 대학 중심의 대형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대는 양자기술과 2차 전지, 바이오 메디컬 연구소를 설립 중이다. 이공계 나와도 실직 걱정 없고 속된 표현으로 대박 나는 세상이 돼야 의대 열풍을 잠재울 수 있다.”

노벨상 나오게 국제 네트워크 강화 중

서울대가 도약하려면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때 아닐까.
“자연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랩(연구실)이 ‘네이처’에 논문 실리는 수준까지는 왔지만 그걸 넘어서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랩 간에 칸막이 때문이다. 노벨상 수상자 보면 대개 복수다. 국내외 학문 네트워크를 갖지 않고는 수상이 어렵다. 그래서 국내외 대학들과 협업을 구축하는 ‘서울대 아웃 리치’를 추진 중인데 그 와중에 서울대의 우수성을 발견했다. 스탠퍼드대 교수를 만났는데 ‘서울대가 2차 전지 연구 성과가 탁월하다’고 하더라. 앞으로 서울대·스탠퍼드대 교수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사회 돼

나라가 ‘수축 사회’로 가고 있다. 타개책은.
“지금 우리 사회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만인이 만인에 투쟁하는 자연 상태’를 연상케 한다. 인구 감소만이 수축이 아니다. 난 수축이란 말을 듣고 ‘중간 영역이 수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중간 영역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있는 커먼(common·각종 공동체)과 퍼블릭(시민사회)을 뜻한다. 국가는 생리적으로 시민단체나 공동체를 독점하고 싶어하는데,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가에 장악되는 상황이 됐다. 개인은 개인대로 물질·개인주의만 남으면서 강한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기 원하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 개인과 국가가 직접 연계되면 강압적 권력이 강화된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우려했던 ‘연성독재(Soft Despotism)’가 이것이다. 해소책은 커먼, 퍼블릭 등 중간 영역이 살아나는 거다. 서울대가 학부·기숙 대학 같은 융합과 소통의 커먼을 만드는 것도 중간 영역 활성화의 목적이 있다.”
정치 사상학자가 첨단 과학 융합에 열정적인 건 뜻밖이다. 배경이 있나.
“초등생 때 슈바이처 자서전을 읽고 의사에의 꿈을 품으며 과학 잡지를 열독했다. 고교 때는 친구 따라 문과 갔지만, 기술 등 이과 과목도 다 배웠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택한 것도 가장 넓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배경 아닐까.”
독자에게 권할 책이 있다면.
“독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의 조건인 ‘마음의 경작(Cultivation)’이다. 링컨은 셰익스피어를 외우다시피 통독하며 얻은 공감력으로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추천할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국가』와 『향연』이다. 어떤 진리가 담긴 건 아니지만, 사고력을 길러 절제와 관용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