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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에 원을 그렸을 뿐인데…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잡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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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정유미 감독이 연필세밀화로 그린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의 한 장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이 연필세밀화로 그린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의 한 장면. [사진 매치컷]

한 소녀가 땅에 원을 그린다. 원 안에 하나둘씩 모여든 사람들은 원이 지워지자 뿔뿔이 흩어진다. 지난 15일(현지시간) 개막한 제7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의 ‘서클’이다. 정교한 연필 세밀화로 대사 없이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렸다. 여백의 미를 살린 7분 분량의 힘 있는 묘사가 풍부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먼지아이’(2009)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한 정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에 네 번째 초청됐다. ‘수학시험’(2010), ‘연애놀이’(2013), ‘존재의 집’(2022)에 이어서다. 정 감독은 베를린 출국 전 전화 인터뷰에서 “간결한 구조로 가볍게 만든 작품이어서 경쟁부문 진출이 의외였지만,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서클’은 보는 시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단편부문 책임자인 안나 헨켈-도너스마르크는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이 원 안에 서로 자기 자리를 잡아 간다”며 “의심과 불통의 시대에 예술이 대안을 보여준 예시”로 꼽았다.

정 감독은 “아이가 장난처럼 그린 의미 없는 틀 안에 사람들이 몰릴 수 있다. 벗어나면 불안해지는 심리가 작동한다”면서 “틀이 없어지면 원래 가고 싶었던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정유미 감독은 우화적 상상으로 내면의 자아 등 삶의 여러 주제를 펼쳐낸다.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은 우화적 상상으로 내면의 자아 등 삶의 여러 주제를 펼쳐낸다. [사진 매치컷]

정 감독은 경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집·해변 등 친숙한 공간에 우화적 상상을 불어넣는다. 반복 구조로 이야기를 확장하며 내면의 자아, 삶의 여러 주제를 펼쳐낸다. 번듯한 양옥집이 한 꺼풀씩 사라지고 발가벗은 사람이 유유히 걸어 나오는 ‘존재의 집’이 대표적이다. ‘연애놀이’는 한 커플의 희로애락을 과자 따먹기·병원놀이·시체놀이 등 유년시절 놀이로 표현했다. ‘파도’는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파도에 여러 인물·동물들의 생사의 변곡점을 새겼다. 집 청소 중 말끔히 치워지지 않는 먼지를 외면하고픈 자신의 못난 모습으로 의인화한 ‘먼지아이’는 박찬욱 감독이 극찬하며 자신의 영화 ‘박쥐’ DVD에 수록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먼지아이’는 예전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잘 못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저항했다면, 욕먹고 누가 미워해도 나만 괜찮으면 좋지 않으냐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면서 만들었다”며 “‘존재의 집’은 우리를 보호하는 집이 무너지면 불안하지만 물질화된 공간이 사라지면서 자유가 시작되는 느낌이 ‘서클’과 닮았다”고 말했다.

정유미 감독이 연필세밀화로 그린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의 한 장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이 연필세밀화로 그린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의 한 장면. [사진 매치컷]

연필화는 “틀려도 수정하고 지울 수 있어 마음 편히 표현할 수 있어서” 어릴 적부터 즐겨 그렸다. 그는 “배경이나 소품을 흑백으로 섬세하게 묘사했을 때 국적·시대가 모호한 지점이 생기고 초현실적인 느낌이 매력적”이라면서 “흑백이 주는 불편감이 좋다. 건조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집중도를 높여준다”고 했다.

‘먼지아이’ 때는 단편 한편 당 5000장 가까이 장면을 그렸지만, 지금은 초반 캐릭터만 연필로 잡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디지털 캐릭터를 만들어 작업 시간을 줄였다. ‘서클’은 5개월 정도 걸렸다. 정 감독은 ‘먼지아이’와 ‘나의 작은 인형 상자’를 그림책으로 출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2014·2015년 각각 라가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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