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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간 헤매 軍응급실 찾았다…"아버지 이대로 돌아가실줄" 딸 울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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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며 정부가 군병원 12곳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전 한 민간인 응급 환자가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며 정부가 군병원 12곳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전 한 민간인 응급 환자가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가 너무 막막하고 암담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0일 낮 12시 경기 분당의 국군수도병원 응급의료센터. 고관절 골절 환자 임모(83)씨가 들 것에 실려 들어왔다. 응급의료센터에서 대기 중이던 문기호(41) 중령이 임씨의 상태를 살폈다. 문 중령은 2022년 10월 전방 부대에서 지뢰 운반 사고로 발목을 절단할 뻔한 표정호 병장 수술의 집도의였다. 임씨의 보호자인 부인 서재희(78)씨와 딸(50)은 그를 포함한 수도병원 의료진들에게 연신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울먹였다.

‘모든 차량 진입 가능’. 이날 찾은 수도병원의 입구에 켜져 있던 사인이다.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해 대형 병원 전공의들이 집단 휴업에 들어가자 군은 수도병원을 비롯한 12개 군 병원을 민간에 개방했다. 수도병원은 이전에도 민간인 치료가 가능하기는 했어도 이용률이 높지는 않았는데, 이날은 임씨처럼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 여럿이 수도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후두암과 뇌경색 등을 앓는 임씨는 남양주 덕소 자택에서 발생한 낙상 사고로 지난 15일 경기 구리시의 Y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병세가 나빠졌고, 19일 Y병원에서 “고령에 지병을 앓고 있으니 대학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임씨의 딸은 이날 밤 10시부터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돌렸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한양대병원, 경희대병원 등에 모두 전화를 돌렸는데 하필 ‘오늘부터 전공의 파업이라 응급실에 와도 아무도 없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3월 말에 외래진료를 받으라고 하는데,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외래를 받느냐“며 “이대로 뼈도 못 붙이고 돌아가시는 건가 너무 막막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의료진 증원을 반대하며 단제 사직서를 체출한 대학 병원 의료진들로 인해 군병원 비상진료체계를 돌입한 가운데 20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진료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부의 의료진 증원을 반대하며 단제 사직서를 체출한 대학 병원 의료진들로 인해 군병원 비상진료체계를 돌입한 가운데 20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진료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전전긍긍하던 임씨의 가족은 ‘국군수도병원을 민간인들에게 개방한다’는 뉴스를 보고선 실낱 같은 희망으로 수도병원 응급실에 전화했다. 응급수술이 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사설구급차를 불러 50여분을 달려 한달음에 분당의 수도병원으로 왔다. 딸 임씨는 “다행히 수도병원에서 받아주셔서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돼 너무 안도감이 들었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다”고 말했다.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임씨의 부인 서씨는 "의사들이 파업을 해도 대체 인력을 준비해 놓고 하든지, 사람을 죽으라고 하는 거냐.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날 오후 1시 20분쯤엔 휠체어에 탄 고령의 민간인 환자(90)가 탈수 증상으로 수도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이 환자의 보호자도 “경기 수원에서 왔다”면서 “다른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수도병원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지난 19일까지 응급실에 내원한 민간인 환자는 30명 수준이다. 대부분 군 장병들이 응급실을 이용하는데, 이날은 이른 오후까지 민간인 두 명이 응급실을 찾은 것이다.

20일 경기 분당 국군수도병원 출입구에 '모든 차량 진입 가능'이란 표식이 떠 있다. 이유정 기자

20일 경기 분당 국군수도병원 출입구에 '모든 차량 진입 가능'이란 표식이 떠 있다. 이유정 기자

수도병원 외에도 의무사 예하 수도·대전·양주병원, 해군·공군 의료시설 등 모두 12개 군 병원이 이날부터 민간에 개방됐다. 해당 병원 응급실은 민간인도 24시간 이용할 수 있다.

국방부는 개방 병원의 경우 민간인의 응급실 내원 편의를 위해 이날부터 보안서약서 절차를 간소화하고, 병원 입구에서 차량에서 하차 하지 않고 신분증만 확인 뒤 출입하도록 하는 등 행정 절차를 축소했다. 민간인 대상 의무기록 발급을 위한 전산 시스템도 보강했다.

석웅(56) 수도병원장은 “병원이 민간인에게 개방돼 있어도 이를 모르시는 분이 많다”면서 ”이번에 좀 더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도록 체계를 정비했다”라고 말했다.

다만 수도병원은 군 병원의 특성상 여성의학·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응급수술과 외래진료를 받을 수 없다고 군 관계자는 설명했다. 응급 분만을 해야 하는 임부의 경우 과거 코로나19 사태 때처럼 병원을 찾지 못해 구급차 등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응급실 이용 가능한 군 병원=국군의무사 예하 수도(경기 분당), 대전, 경기 고양·양주·포천, 강원 춘천·홍천·강릉, 서울지구병원, 해군 해군포항병원, 해군해양의료원, 공군 공군항공우주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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