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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깬 복면 과부…지상파 사극, 믿고 보는 드라마 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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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밤에 피는 꽃’은 과부가 된 주인공 조여화(이하늬)가 밤마다 복면을 쓰고 한양 곳곳에서 악인을 응징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이야기다. 사진 MBC

드라마 ‘밤에 피는 꽃’은 과부가 된 주인공 조여화(이하늬)가 밤마다 복면을 쓰고 한양 곳곳에서 악인을 응징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이야기다. 사진 MBC

혼인 첫날 얼굴도 못 본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 15년 동안 소복을 입고 집 안에 갇혀 남편을 추모해야 했던 주인공은 밤이 되면 복면을 쓰고 집 밖으로 나온다.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아내 혹은 며느리가 아닌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17일 종영한 MBC 드라마 ‘밤에 피는 꽃’(12부작)은 가부장제 조선 시대에 남편을 잃은 주인공 조여화(이하늬)의 이중생활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드라마는 3회 만에 시청률 10%(닐슨)를 넘어섰고, 마지막 회에 18.4%로 역대 MBC 금토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KBS는 창사 50주년을 맞아 32부작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방영 중이다. 사진 KBS

KBS는 창사 50주년을 맞아 32부작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방영 중이다. 사진 KBS

KBS가 창사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32부작) 24회(4일 방영)에선 고려 황실에 반발심을 가진 무신들이 반란을 꾀하며 드라마가 새 국면에 들어섰는데, 순간 최고 시청률은 10.9%까지 치솟았다. 고려가 거란에 맞선 두 차례 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화제를 모은 드라마는 줄곧 10% 안팎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지상파 드라마, 사극으로 실패 부담↓

정통 사극부터 액션·멜로 등 장르가 혼합된 퓨전 사극까지, 요즘 지상파와 tvN 등 채널에선 사극이 대세다. 금·토 드라마인 ‘밤에 피는 꽃’과 토·일 방영되는 ‘고려 거란 전쟁’, ‘세작, 매혹된 자들’(tvN) 등 3편의 사극이 주말마다 비슷한 시간에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 제작과 편성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각 방송사가 사극에 힘을 쏟아붓는 모양새다.

지상파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지난해 흥행했던 드라마 ‘연인’의 후속작으로 MBC는 ‘열녀박씨 계약결혼뎐’과 ‘밤에 피는 꽃’을 순서대로 선보였다. 일일 드라마를 제외하면 금·토 드라마가 유일한 가운데 사극 장르를 꾸준히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부터 ‘고려 거란 전쟁’을 방영 중인 KBS 역시 같은 시기에 여러 편의 퓨전 사극을 내놨다. 월·화 드라마 ‘혼례대첩’은 지난해 12월 종영했고, 후속작으로 판타지 사극 로맨스 ‘환상연가’가 방영 중이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지상파 3사에서 편성된 드라마는 32편(KBS 14편·MBC 9편·SBS 9편)이다. 총 40편을 편성했던 2022년보다 20% 줄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주중 드라마 편성이 점점 사라지는 지상파에선 리스크(위험 부담)가 덜한 작품을 내야 한다. 경험도 많고 유리한 사극을 지상파가 계속해서 택하는 이유”라고 짚었다.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은 가상의 조선 임금 이인(조정석)과 첩자 강희수(신세경)의 운명적 사랑을 그렸다. 사진 tvN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은 가상의 조선 임금 이인(조정석)과 첩자 강희수(신세경)의 운명적 사랑을 그렸다. 사진 tvN

지상파는 수십년 간 사극을 만들며 제작 노하우와 인프라를 쌓았다. '용의 눈물'·'태조 왕건'·'불멸의 이순신'·'대조영'(이상 KBS), '허준'·'대장금'·'주몽'·'선덕여왕'(이상 MBC), '뿌리깊은 나무'(SBS) 등이 지상파가 내놓은 대표적인 인기 사극이다.
28년 동안 KBS에서 드라마를 만든 김상휘 CP(책임 프로듀서)는 “KBS는 ‘전설의 고향’ 등 과거부터 다양한 장르의 사극을 많이 했다. 대하 사극을 많이 만들어온 방송국이라 사극 DNA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극은 세트 뿐 아니라 분장·의상·소품 등 미술팀의 노하우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이 가능한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역사저널 그날’ 등 교양 프로그램을 통해 자문을 구할 수 있는 학계 네트워크 역시 탄탄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MBC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용인에 사극 세트장을 갖고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를 아우를 수 있어, 촬영지 물색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SBS에서 ‘바람의 화원’(2008), ‘뿌리깊은 나무’(2011) 등 사극을 만들었던 장태유 PD는 이번에 ‘밤에 피는 꽃’을 연출하며 “용인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사극 만들기에 최적화된 곳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제작 환경에 만족감을 표한 바 있다.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연인'은 마지막회(20회)에서 시청률 12.9%(닐슨)을 기록하며 흥행했다. 사진 MBC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연인'은 마지막회(20회)에서 시청률 12.9%(닐슨)을 기록하며 흥행했다. 사진 MBC

요즘 사극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청자의 공감대를 높인다. 정 평론가는 “사극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현재에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드러낸다”면서 “기성세대에겐 친숙하고, 젊은 세대는 요즘 이야기를 역사적 틀로 신선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시청 세대의 폭이 넓다”고 분석했다.

‘밤에 피는 꽃’을 기획한 남궁성우 EP(총괄 프로듀서)는 “조선 시대에 과부는 죽어도 아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존재였다. 별채를 둘러싼 담을 넘는 것 자체가 과부에겐 커다란 금기인 것”이라면서 “그 금기를 깨고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겠다는 인물의 몸부림에 시청자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이 저렇게 살았어?’ 하며 충격 받는 젊은 층의 반응은 (기성세대인 제 입장에선) 의외였는데,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지상파의 한 드라마 PD는 "요즘 지상파 사극이 화제성, 시청률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건 고무적인 일"이라며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등 플랫폼 다양화 시대에서 지상파가 잘 할 수 있는 장르가 사극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만큼, 지상파의 사극 제작 추세는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OTT, 저조한 사극 제작

총 2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고려 거란 전쟁'은 대하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사진 KBS

총 2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고려 거란 전쟁'은 대하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사진 KBS

지상파와 달리, OTT에서 사극은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역대 가장 많은 오리지널 시리즈를 공개했던 넷플릭스의 경우 총 14편 중 2편 정도가 역사물인데, 그마저도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끌어온 ‘시대극’에 가깝다. 추석을 앞두고 공개한 ‘도적’은 ‘오징어 게임’·‘수리남’ 등 앞선 추석 히트작들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남겼고, 700억 대작 ‘경성크리처’는 호불호 반응이 엇갈렸다.

김상휘 CP는 “사극은 특정 시대나 문화적 배경을 알고 봐야 하기에 글로벌을 겨냥한 기획이 나오긴 쉽지 않은 장르”라면서도 “넷플릭스가 ‘고려 거란 전쟁’을 글로벌 방영하고 있는데 중국·동남아 등의 반응이 괜찮아서 아시아권을 겨냥한 규모 있는 액션 사극을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갓·한복 등 사극이 보여주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다른 K-콘텐트 못지 않은 글로벌 수요층이 있다"며 "우리 역사를 잘 아는 PD들이 늘어나 (플랫폼을 넘나드는) 다양한 제작 활동을 하게 된다면, 사극의 글로벌화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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