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인장의 품격은 글씨로부터"... 『전각을 말하다』 낸 박원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박원규 작가가 평소에 즐겨 쓰는 인장 '규'. 박재형 사진작가 촬영.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가 평소에 즐겨 쓰는 인장 '규'. 박재형 사진작가 촬영.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가 전각을 하고 있는 모습. 박재형 사진작가 촬영.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가 전각을 하고 있는 모습. 박재형 사진작가 촬영. [사진 한길사]

전각(篆刻)이란 나무나 돌, 금속에 인장(印章)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에겐 계약서나 서예 작품 귀퉁이에 찍은 흔한 도장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자를 누가 고르고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따라 그것은 '예술'이 된다. 한국 서단의 거목 하석(何石) 박원규(76) 씨는 "전각은 문학과 회화, 조각을 하나로 모은 종합예술이며 동양예술의 진수"라고 말한다. "갑골문에서 출발한 전서(篆書)가 서예라는 흑백(黑白)의 예술을 넘어 이른 주백(朱白 )의 예술"이라는 얘기다.

2010년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를 낸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박씨가 최근『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를 펴냈다. 김정환(54) 서예 평론가가 묻고 한국전각협회 명예회장인 박씨가 답하는 형식으로 쓰인 책은 인장의 매력과 의미에서 시작해 전각예술의 뿌리, 전각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 전각 제작의 실기를 모두 아우른다.

전각, 주백(朱白 )의 예술

서울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원규(왼쪽) 작가와 김정환 서예평론가. [사진 한길사]

서울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박원규(왼쪽) 작가와 김정환 서예평론가. [사진 한길사]

박씨는 국내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일찍이 강암(剛庵) 송성용(1913~1999) 선생 문하로 입문해 서예를 배우고, 대만에 유학해 독옹 이대목 선생에게 전각을 배웠다. 1983년 첫 작품집 『계해집』을 시작으로 25년간 매년 작품집을 내왔으며, 그중 네 권이 전각집이다. 1985년에 펴낸 『마왕퇴백서노자임본』은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씨는 "전각은 문자를 기본바탕으로 한다"며 "그러나 모든 서예가가 다 잘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공간 감각이 있어야 하고, 시대에 따른 감각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전각에 대한 얘기를 더 들어봤다.

"문자학, 역사, 문학, 미학 다 담겨"

박원규 작가가 새긴 인장과 그 구관. 박 작가는 "인장의 구관은 석각예술의 보배"라고 했다.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가 새긴 인장과 그 구관. 박 작가는 "인장의 구관은 석각예술의 보배"라고 했다.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의 스승 이대목의 인보에서 발췌한 작품.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의 스승 이대목의 인보에서 발췌한 작품. [사진 한길사]

전각과 낙관은 어떻게 다른가.  
낙관(落款)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로, 여기서 낙은 '떨어질 낙'이 아니라 '완성됐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낙관은 작품을 완성하고 각을 찍는 행위이고, 낙관할 때 쓰는 인장을 바로 전각이라고 한다. 따라서 전각은 문자를 새겨 넣는 작업과 그 결과로서의 인장 모두를 뜻한다.
전각이 '방촌(方寸)의 예술'이라고. 
방촌이란 '한 치 사방의 넓이'를 뜻한다. 전각은 손가락 한두 마디에 불과한 크기(가로와 세로가 각각 3.03㎝가량)에 문자를 새겨 넣는 작업으로, 작은 우주에서 이뤄지는 예술이란 뜻이다. 

그는 "전각이 문자를 다루는 일이고, 글자를 선택해 써야 하므로 먼저 한자를 읽고 해석할 줄 알고 서예를 알아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제가 추천하는 공부법은 '대가를 찾아가서 공부하는 것"이고 덧붙였다. "무엇이든 그 분야 최고 전문가에게 배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평소 그가 늘 강조하는 내용이다.

박씨가 전각을 배우기 위해 스승 이대목 선생을 만나게 된 계기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전주에서 독학으로 전각을 익히던 그는 서울 명동의 서점 ‘중화서국’에서 우연히 당대 대만 전각가들의 작품집을 접했다. 그중에서도 이대목의 주백상간인(朱白相間印·음각과 양각이 함께 있는 전각)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길로 그는 대만대사관에 작가의 주소를 수소문하고 "저의 아호와 성명인을 제작해주시면 평생의 영광으로 알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3년 만에 그로부터 전각 작품을 받았지만 박씨는 작품을 보고 실망했다. 이후 고민 끝에 "예전에 작품집에서 본 선생님 작품 수준이 아니어서 실망스럽다"는 글과 함께 작품을 되돌려 보냈다. 다시 세월이 흐른 뒤 이대목은 "제자가 대신 새긴 것"이라는 내용의 정중한 사과 편지와 새로 제작된 작품을 보내왔다. 이후 박씨는 1979년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받고 이대목을 찾아가 3년간 전각 수업을 받았다.

인장의 역사도 흥미롭다. 한나라와 진나라 시절에는 인장을 소유하는 게 관직을 맡음을 의미했고, 원나라 이전까지 인장은 주물로 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명나라 때 칼로 깎아낼 수 있는 돌, 회유석이 널리 쓰이면서 개인이 전각을 새기고 인장을 소유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박씨는 "전각에 중요한 것은 칼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한문에 대한 이해"라며 "인장은 글씨로부터 시작하고, 인장의 품격은 글씨로부터 나온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구관(具款)'을 보면 작가의 격(格)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구관이란 인주를 묻히지 않는 면에 새겨 넣은 글자를 말하는데, 이번 책에 그는 명·청 시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남긴 구관 40여 편을 모아 직접 해설을 붙여 소개했다.

"『추사(秋史)를 말하다』낼 계획" 

박원규 작가가 제자의 요청을 받아 제작한 인장에 새긴 구관의 한 부분. [사진 한길사]

박원규 작가가 제자의 요청을 받아 제작한 인장에 새긴 구관의 한 부분. [사진 한길사]

구관이 왜 중요한가. 
구관은 그 자체로 시이자 수필이다. 전각의 격은 구관에서 나온다. 깨알 같이 새겨 넣은 그 글에 전각가의 학문적 깊이와 미학적 감각, 교우 관계가 다 드러난다. 명·청 전각가들이 예술적으로 새긴 전각에선 고고함과 졸박함, 웅장함과 완곡함, 호방함 등 다양한 개성과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서예와 전각은 모두 한문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사람이 배우고 즐기기엔 한계가 있어 보이는데.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한문 교육에 대한 편협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한문을 배우는 게 고리타분한 일이 아니라, 더 풍요로운 감성과 지성을 겸비할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야 한다. 특히 전각은 글을 이해하고, 손을 통해 문자의 형상과 의미를 절묘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김정환 평론가와 두 권의 책을 낸 그는 "앞으로 『박원규 추사(秋史)를 말하다』를 함께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한 명사의 요청을 받고 쿠란 3장 알 임란(Al Imran)의 200절 말씀 "참고, 견디고, 뭉쳐라"를 붓글씨로 썼다"는 그는 "내가 꼭 이루고 싶은 다음 꿈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라며 활짝 웃었다. 한편 오는 3월 7일 오후 3시 서울 순화동천에서 저자 박씨가 강연하고 김 평론가가 진행하는 북토크가 열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