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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은 나운규 영화 ‘아리랑’ 주제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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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호 24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아리랑의 재탄생

한민족이 공통으로 부르는 아리랑은 모던의 중심지, 종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근대민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여하는 국제행사에서 국가(國歌) 대신 활용하는 아리랑,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응원가로 부르는 아리랑은 원래 본조아리랑(또는 서울아리랑)이라고 한다.

아리랑은 종류가 많다.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경기자진아리랑, 경기긴아리랑, 본조아리랑, 광복군아리랑 등 퍽 많다. 민요학계에서는 민요나 소리를 ‘향토민요’ ‘통속민요’ ‘신민요’ ‘대중가요’로 나눈다.

1954년 이강천 감독판으로 평화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 포스터.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54년 이강천 감독판으로 평화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아리랑’ 포스터.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향토민요는 특정 지역에서 노동·생활과 함께 지역민들에 의해 불리며 전승되는 전형적인 민요로서 토속민요라고도 한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기 어렵다. 정선·평창·영월·강릉 등지에서 이어온 정선아라리가 바로 향토민요다.

전문소리꾼이 그런 향토민요를 채택해 다듬어 편곡해 레퍼토리로 만든 민요를 통속민요라고 한다. 소리가 유행할 수 있는 환경, 유흥의 장, 놀이판, 시정에서 상품성과 소리꾼 및 소비자 등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19세기 중후반 잡가의 유행과 함께 생성된 소위 ‘경기 민요’, ‘서도 민요’, ‘남도 민요’의 육자배기, 수심가, 창부타령 등이다. 잡가집의 아리랑이 통속민요인데, 경기긴아리랑과 경기자진아리랑 등이 그것이다.

정선·평창·영월 지역 향토민요 정선아라리가 경복궁 중수 공사(1865~1868) 때 서울로 퍼져  전문 가객들에 의해 편곡되고 레퍼토리로 만들어져 유행한 것이 경기긴/자진아리랑이다. 1395년(태조 4년) 창건된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됐지만 재건하지 못하다가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대원군이 중수 공사에 착수했다. 경복궁 중수 공사에는 조선 8도의 백성들뿐 아니라 강원도 일대의 목재를 한강으로 운반하면서 영동지역의 뗏목꾼들도 동원했다. 경복궁 중수 공사 부역꾼들을 위해 사당패, 농악대, 소리꾼들을 모아 위문잔치를 열었고 노래자랑도 개최했다고 한다. 이때 강원도 부역꾼이 정선아라리를 불렀고 이에 감명 받은 전문 가객이 채택해 통속민요 경기긴/자진아리랑으로 레퍼토리화했다. 이후 서울 경기 인근 소리판, 놀이판에서 경기긴/자진아리랑이 널리 유행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주제가, 본조아리랑

1.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2.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사린 말도 많다

3.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4.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 가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시나리오·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192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시나리오·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위 아리랑 노래는 나운규(감독·시나리오·주연)의 영화 ‘아리랑’(1926) 주제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통속민요 경기자진아리랑을 바탕으로 단성사(團成社) 악대가 새롭게 편곡해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본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이다. 나운규는 함경도 회령 사람으로 어린 시절 남쪽에서 온 철도공사판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감명 받아 가슴에 간직해 왔는데, 막상 서울에 와서 이 아리랑을 듣고자 했으나 찾을 수 없어서 예전에 들었던 멜로디를 생각해 내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해서 만들었다고 술회했다.(「나운규 대담」, 삼천리, 1937.1)

당시 ‘대학생이 사현금(四絃琴, 바이올린)으로 급우인 광인(狂人)이 부르는 아리랑 노래를 맞추는 것도 좀 서툴렀거니와 (중략) 농촌과 그곳에 들어온 도회 풍조와 조화가 못 된’(매일신보, 1926.10.10.) 것이라며 아리랑이 비판받기도 했다. 양악에 의해 편곡·반주된 본조아리랑이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서정을 관철하지 못하고 도회적이고 서양적인 풍조와 어설프게 절충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주제가 본조아리랑이 근대적 악곡에 맞추어 편곡됨으로써 기존의 지역분할적 음악양식인 선법토리(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 평안도 수심가토리, 태백산맥 주변의 메나리토리, 서울 경기의 경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계급이나 신분, 성별, 세대의 구별 없이 전면적으로 전국에서 불리게 된 것이다. 본조아리랑은 영화라는 근대적 미디어와 테크놀로지, 근대적 시스템 속에서 산출되고 유통되다 보니 일반 유행가와의 경쟁 속에서 인기를 구가하며 퍼져나갔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확산과 재생산

영화 아리랑의 히로인은 주제가 본조아리랑이었다.

현대 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영화사상의 신기록! 당당 봉절!

촬영 3개월간! 제작 비용 일만 오천 원 돌파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북구(北丘)의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 보내며 아리랑 떠나며 아리랑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

보라! 이 눈물의 하소연! 일대 농촌 비시(悲詩)!

누구나 보아둘 이 훌륭한 사진! 오너라! 보아라

1920년대 ‘아리랑’을 상영한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20년대 ‘아리랑’을 상영한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에서 영화 ‘아리랑’ 광고(조선일보, 1926.10.1.)를 만들어 시내에 배포하다가 선전지를 압수당했다.

작 1일부터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의 활동사진 광고 팸플릿 중에 ‘아리랑 노래’ 중에 공안을 방해할 가사가 있음으로 경찰당국에서는 9월 30일에 선전지 1만 매를 압수하였다더라.(매일신보, 1926.10.3.)

‘아리랑-선전지 압수, 내용이 불온’이라는 위 기사에 의하면, 노래 아리랑 가사가 불온하여 선전지 1만 매를 압수당했다는 것이다. 위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 바로 하단에 영화 아리랑 광고가 실렸는데, 거기엔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가사가 삭제돼 있다. 영화와 본조아리랑은 1920년대 당시 삶의 터전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이산과 유랑, 이주가 대대적으로 발생하는 민중 현실을 ‘아리랑 고개’에 투사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과의 이별 고개, 아리랑 고개는 민족의 가슴 속에 사무친 ‘피눈물의 고개’로 각인됐다. 동시에 아리랑 고개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지금 여기’의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를 충전하며 아리랑을 불렀다. 이러한 민족의 보편적 정서와 주제를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 본조아리랑이 담아냈던 것이다. 아리랑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이었던 신일선(영희 역)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리랑이 개봉되자 서울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했고 관객은 문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관 앞에 기마 순사가 동원되기도 그때가 처음이었고, 관객이 밀린 단성사는 문짝이 부서지기까지 했다. 극장 안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게 초만원이었고 어린애를 데려온 관객은 꼼짝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뉘어야 하는 등 큰 혼잡을 이뤘다. 아리랑은 그 후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전국 방방곡곡 안 간 곳이 없고 심지어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는 가설극장까지 지어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던 것이다.(신일선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1970.11.24.)

극장에서 아리랑을 보고 부르고 함께 울고 느끼며 서로 동질감(민족정체성)을 확인했다. 아리랑은 바로 이때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단성사는 지방 순업대(巡業隊)를 조직하여 전국 12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나아가 만주·연해주·중국·미주·중앙아시아까지 한민족이 가는 곳엔 아리랑이 함께 하며 정체성을 확인했다. 아리랑은 민요를 넘어 대중가요로, 노래를 넘어 근대적 미디어(음반·영화·연극·무용 등)와 결합하며 재창조됐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표상을 넘어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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