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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원, 하와이 한인 이민자 공동묘지에 4m 위령비 조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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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호 22면

예술가와 친구들

조각가 박석원. [사진 박석원]

조각가 박석원. [사진 박석원]

박석원은 1942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자 박씨 가족은 경남 창원 안민리로 돌아왔다. 안민에는 인근 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유명한 고찰 성주사와 마산에서 창원을 거쳐 진해로 가는 진해선의 성주사역이 있었다. 안민리와 30리 상거의 창원 읍내에는 선배조각가인 김종영(1915~1982)이 살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안민고개만 넘으면 바로 진해다. 박석원이 창원 성주국민학교 1학년 때 가족들은 진해 화천동으로 이사했다. 그들이 터를 잡은 집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 나가야(長屋)였는데, 도로가 팔방으로 뻗은 중원로터리에서 가까웠다. 나가야는 같은 크기와 형태를 가진 몇 채의 가옥이 연결된 연립주택을 말한다.

6·25 전쟁이 났다. 조각가 윤효중, 화가 김환기 등 종군화가, 종군작가들이 진해에 몰렸다. 키가 큰 김환기는 과자가 든 배낭을 메고 껑충 걸음으로 산을 넘어 서울대 미대 교수 동료였던 창원 김종영의 집을 찾아가서 그의 딸에게 사탕을 건네다 주었다. 전쟁으로 진해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도 몰려들어 함께 북적였다.

일본서 태어나 창원·진해서 자라

박석원이 제작한 하와이 알라이 한인 공동묘지 입구의 위령비(1998). [사진 박석원]

박석원이 제작한 하와이 알라이 한인 공동묘지 입구의 위령비(1998). [사진 박석원]

박석원이 도천국민학교와 진해중고교를 다니던 무렵, 해군사관학교는 물론이고 육군사관학교(1951년~1954년)와 공군사관학교(1951년~1958년)도 진해에 몰려 있었다. 봄이면 사관생도들이 훈풍에 날리는 벚꽃 잎을 헤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진해의 소년들은 자연스레 사관학교 생도가 되는 꿈을 키웠고 박석원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진해중학교 2학년 때 미술교사 유택열(1924~1999)이 부임해 왔다. 함경도 북청 태생의 유택열은 판화가로 홍대 교수를 지낸 유강열(1920~1976)의 사촌동생이었다. 방과 후에는 특활 시간이 있었다. 박석원은 유택열이 지도하는 미술 특활반에 들어갔다. 이젤을 들고 사생을 나가는 기분이 좋았다. 진해고교에 입학했어도 유택열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유택열의 아틀리에는 진해공설운동장 근처의 나가야(長屋)에 있었다. 석고상이 있었다. 사관생도를 꿈꾸었던 박석원은 다른 꿈이 부풀었다. 유택열에게 자신의 진로를 상담했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유택열의 화실에서 두 달 동안 목탄 드로잉 개인교습을 받았다. “덩어리가 나와야 돼!” 유택열은 덩어리가 나오면 형태는 나중에 따라온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열심히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 종이 위에서 덩어리 같은 게 불쑥 나왔다. 박석원은 드로잉 안에서 조각의 언어, 덩어리를 배웠던 셈이다. 오래전에 스승이 강조한 ‘덩어리’는 여전히 박석원의 화두다.

유택열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유택열은 1955년부터 중원로터리에서 흑백다방을 운영했다. 흑백다방은 클래식 음악다방이었다. 전혁림, 박생광, 김춘수 등 진해를 방문한 숱한 문인, 예술가들이 이 다방을 거쳐 갔고 유택열과 교유했다. 음악, 미술 등 종합적 교양을 고루 갖추었던 유택열은 박석원을 아꼈다. 1968년 박석원이 국전에서 국회의장상을 타자 유택열은 제자의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진해 시내에 걸었다. 제자는 그 고마움에 화답했다. 박석원이 애를 써서 1981년, 유택열의 개인전이 대학로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렸다. 이경성이 글을 쓰고 화가 김영주, 평론가 유준상 등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페이지 갤러리에 전시 중인 박석원의 조각 작품 ‘적의-9407’(1969). [사진 박석원]

페이지 갤러리에 전시 중인 박석원의 조각 작품 ‘적의-9407’(1969). [사진 박석원]

해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인 황기 사범이 진해교회 건너편에 무덕관 도장을 차려 퇴근 후 저녁에 수련생을 지도했다. 소년 박석원은 덩치는 작았지만 몸이 날랬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이 도장을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역 근처에 있는 무덕관 본관에 와서 승단심사를 받았다. 품새 시범을 하고 적벽돌 한 장을 맨손으로 격파해야 하는 어려운 심사였다. 드디어 유단자가 되었다. 미술을 통해 정신의 고양을, 운동을 통해 강인한 육체의 수련을 해가며 소년은 점점 청년이 되어갔다.

박석원은 홍익대 조각과에 진학했다. 조각가 김경승은 학생들에게 흙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점토를 손으로 이기고 떡메로 치는 일은 힘든 노동이었다. 전기로 작동하는 토련기는 아직 없었다. 메를 치면 칠수록 흙의 점력은 강해진다. 그 감각이 좋았다. 흙을 만지니 어린 시절 개울가에서 찰흙을 떠다가 흙장난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순수한 몸 마음으로 돌아갔다. 김경승은 “조각은 묘사가 아니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하여 그 점이 우주로 확산하는 게 조각이다”라고 강조했다.

나중에 만난 평론가 이일은 ‘환원과 확산’을 내걸었다. 김경승식으로 말하면 환원은 점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고, 확산은 우주로 충만해 나가는 과정이다. 김경승과 이일의 가르침이 박석원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박석원은 전북대, 중앙대를 거쳐 홍익대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구(球)를 만들어라. 점을 향해서 흙을 붙여 나가라”라고 말하며 환원과 확산을 강조했다.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 참여

1971년 ‘AG전’을 위해 경복궁 국립미술관에 모인 예술가들. 왼쪽부터 이승택, 신학철, 이강소, 하종현, 김한, 김구림, 이승조, 박석원, 이건용, 한 사람 건너 송번수, 서승원, 최명영. [사진 박석원]

1971년 ‘AG전’을 위해 경복궁 국립미술관에 모인 예술가들. 왼쪽부터 이승택, 신학철, 이강소, 하종현, 김한, 김구림, 이승조, 박석원, 이건용, 한 사람 건너 송번수, 서승원, 최명영. [사진 박석원]

1969년에 결성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그룹)는 이일 등 비평가와 박석원 등 많은 작가들이 함께 참여했다. 이일은 실상과 허상, 현실과 실현 등 새로운 이론으로 젊은 작가들을 자극했다. 더 큰 자극을 찾아 박석원이 처음 해외에 나간 건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는 여권 발급이 까다로웠다. 박석원은 1968년, 1969년 국전에서 연거푸 국회의장상을 받았는데 수상 혜택 중의 하나가 여권 발급이었다. 이때 받은 여권은 몇 년이 지났건만 유효했다. 막상 파리로 가려는데 정보가 너무 없었다. 서울에서 파리로 왕복하는 것보다는 일단 동경으로 가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김포공항 청사 내에서 환승하여 파리로 가는 게 싸다는 기막힌 정보도, 파리의 물랑호텔의 숙박비가 싸다는 것도 일본에서 세계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던 선배 작가 이우환이 알려주었다. 파리로 가서 김창열, 한묵 등 선배작가들을 만났다.

박석원은 1975년에 홍익대 대학원을 마쳤다. 이일을 지도교수로 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에 관한 논문을 썼다. 당시는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 관한 자료는 국내 반입이 힘들었다. 이일이 파리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가져온 구성주의에 관한 불어 원서에 기대어 논문을 쓸 수가 있었다. 석사 논문은 400자 원고지에 써야 하는데, 이를 후배 이병용(1948~2001)이 연필로 반듯하게 대필해 주었다.

지리산 청학동 출신의 이병용은 1978년 뉴욕으로 갔다. 예전에는 한국 미술가들이 파리나 뉴욕을 가면 현지의 선후배 미술인을 무작정 찾아가 신세를 졌다. 이병용은 아르바이트로 택시 드라이버를 했기에 길눈이 밝았다. 뉴욕에서 이병용의 신세를 지지 않는 서울의 미술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박석원, 심문섭 등 선배들이 나서서 1991년 서울 갤러리현대의 전시를 추진했다.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이병용은 뉴욕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하여 한인회장이 되었다. 박석원이 하와이의 이병용을 찾아갔다. 구한말에 7000명이 넘는 한인들이 인천항을 떠나 하와이로 이민을 왔다. 그들은 사탕수수밭의 노동자가 되었다. 이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하와이의 힐로에 있는 알라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한인 공동묘지 왼편은 일본인 초기 이민자들의 공동묘지다. 그곳은 깨끗하게 단장이 잘 되어 있는데 한인 이민자의 무덤은 손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400평 규모의 생강밭을 경작하면서 그림을 그리던 이병용은 틈틈이 한인 이민자 공동묘지의 무덤들 앞에 빗돌을 세우고 파헤쳐진 봉분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병용은 박석원에게 공동묘지의 입구를 장식할 위령비로서의 조각품을 부탁했다. 서울로 돌아온 박석원은 4m 높이의 대형 돌 조각을 제작했다. 조각품은 대한항공의 도움으로 한인 공동묘지까지 옮겨졌다. 미술가 선후배가 힘을 합쳐 한인 이민자 공동묘지는 드디어 번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박석원은 세우는 조각이 아닌 쌓는 조각을 한다. 그래서 작품명에 적의(積意)가 많다. 세운다 함은 중력에 저항하는 일이다. 쌓는다 함은 중력의 질서를 따르는 일이다. 이젠 삶 그 자체가 질서가 되어버린 노경의 작가 박석원이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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