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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공들인 '형제국'마저…'韓·쿠바 수교' 충격의 북, 입 다물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1월 4일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백화원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1월 4일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백화원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한국이 북한의 '형제국'인 쿠바와 14일 전격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은 최근 중국·러시아 등 전통적인 우방 국가들과 '반미연대'를 강화하는 북한의 외교 전략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어젯밤 관련 소식이 타전된 후 국내외에서 관련 반응이 잇따르고 있지만, 오늘(15일) 아침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 등에선 일절 관련 소식을 다루지 않았다. 외교가에선  1992년 한·중 수교 때 처럼 북한이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겠지만 실제 충격은 상당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64년 형제의 뒤통수

북한과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에 성공한 지 1년 만인 1960년 8월 29일에 공식 수교를 맺었다. 이후 양국은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반미'와 '사회주의' 연대를 축으로 혈맹에 준하는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양국에서 '혁명 1세대'로 불리는 김일성 주석과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서로의 '반미·반제노선'에 지지를 표명하면서 비동맹·제3세계 외교를 펼쳤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1월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11월 방북한 미겔 디아스카넬 당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무개차를 타고 평양 시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에도 쿠바는 핵·미사일 고도화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과 호의적인 관계를 이어가며 '형제국'의 의리를 지켰다. 김정은은 2016년 피델 카스트로 사망 당시 북한 주재 쿠바 대사관을 직접 찾아 "탁월한 지도자는 비록 서거하였지만, 그의 이름과 업적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영생할 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국가평의회 의장 시절이던 2018년 11월 평양을 찾았다. 당시 김정은은 미국과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사흘간 일정을 함께하며 돈독한 양국관계를 과시했다. 북한은 2024년 첫날에도 김정은 명의로 디아스카넬 대통령에게 쿠바 혁명 65주년을 축하하는 장문의 축전을 보냈다.

귀띔조차 없었나?

이번 수교는 모든 과정이 '극비'로 진행됐고 한국시간으로 한밤(23시)에 전격 발표됐다. 쿠바도 북한에게 그간 분위기를 전달했을 것으로 보이나, 한국과 수교 논의를 본격화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소통했을지는 의문이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오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 82주년을 기념해 주북 외교사절을 대상으로 진행한 경축 연회의 모습. 적색원이 가르시아 쿠바 대사 추정인물. 주북 러시아 대사관 홈페이지 캡처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오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 82주년을 기념해 주북 외교사절을 대상으로 진행한 경축 연회의 모습. 적색원이 가르시아 쿠바 대사 추정인물. 주북 러시아 대사관 홈페이지 캡처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한-쿠바 수교 당일인 지난 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 82주년을 기념해 만수대의사당에서 북한 주재 외교다을 위한 경축 연회를 진행했다. 지난 1일에 새로 부임한 에두아르도 루이스 코레아 가르시아 주북 쿠바 대사도 이 연회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주북 러시아 대사관이 공개한 이날 연회 사진에서도 가르시아 대사의 모습이 포착됐다. 수교 당일까지 주북 대사를 초청한 걸 두고 "북한이 한-쿠바 수교 논의를 직전까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북한 매체들이 이날 북한 주재 외교단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쿠바를 언급하지 않아 한-쿠바 수교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노동신문은 이날 북한 주재 외교단과 무관단이 김정일 생일 82주년을 맞아 꽃바구니와 축하편지를 전달했다고 소개했는데 쿠바 국명은 어느 행사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도 이날 앞서 언급한 외교단 경축 연회 소식을 전하면서 쿠바 대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쿠바 당국이 실제로 북한에 귀띔을 하지 않았다면, 1992년 한·중 수교 당시와도 차이가 있다. 외교부가 지난해 4월 공개한 1992년 한·중 수교 당시 외교문서에 따르면 김용순 노동당 국제부장은 한·중 수교(1992년 8월 24일) 이틀 전에 방북한 후카다 하지메 일본 사회당 의원에게 "수교 일자 통보는 약 1주일 전에 있었다"며 "북·중 관계는 혈맹 관계이므로 앞으로 계속 발전돼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후카다 의원은 당시 "한·중 수교에 대해 북한 노동당 간부들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고도 전했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는 "북한이 정치적으로 공을 들여왔던 형제국인 만큼 일정 부분 타격이 있을 것"이라며 "내부적으로 한·중 수교 당시와 비슷한 정치적 충격파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6년 11월 북한 주재 쿠바대사관을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망에 조의를 표시하는 모습. 노동신문,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6년 11월 북한 주재 쿠바대사관을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망에 조의를 표시하는 모습. 노동신문, 연합뉴스

일단은 무반응

북한이 대표적인 우방국인 쿠바와의 결별을 선택할 만큼의 격한 반응을 내놓을 가능성은 작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김정은 정권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고립이 심각하기 때문에 외교적 운신의 폭넓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당장 북한과 쿠바 관계를 단절시킬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논쟁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1992년 9월 18일 주홍콩 한국 총영사가 주홍콩 일본 영사에게 들은 내용을 보고한 외교문서에는 "한·중 수교 이후 김정일(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장시간의 내부 연설을 통해 일부 공산주의 국가들이 돈 때문에 공산주의 원칙마저 포기하고 있다는 등 중국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함"이라고 적혀있다. 북한 당국이 혈맹인 중국에 비견될 정도로 쿠바를 각별히 예우하며 공을 들여왔던 만큼 배신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얘기다.

당장은 쉬쉬한다고 해도 대북정보 유입과 북한 내 정보 유통이 이전보다 활발해진 상황에서 한-쿠바 수교 소식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관측도 나온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은 정권이나 외무성, 노동당 국제부문에 대한 비판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쿠바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함께 내부 사상 단속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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