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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도 12시간 전에 알렸다…韓∙쿠바 '극비리 수교' 전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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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밤 전격 발표된 한국과 쿠바의 수교는 사회주의 국가 중 유일한 미수교국과 마지막 퍼즐을 맞췄다는 점에서 1990년대 북방외교 이후 최대 외교 성과로 꼽힌다. 이번 수교 협상은 외교부 본부나 서명이 이뤄진 뉴욕 유엔본부 직원들도 소수만 알고 있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지난해 7월 촬영된 쿠바 수도 아바나의 전경. EPA. 연합뉴스.

지난해 7월 촬영된 쿠바 수도 아바나의 전경. EPA. 연합뉴스.

"수십 년 만에 임계치 채웠다"

관련 상황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들은 이번 수교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고 공통적으로 강조했다. 쿠바와의 수교는 수십 년 간 외교적 숙원이었는데, 마지막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임계 질량)를 채웠다는 비유도 나온다. 양국 간 "이해 관계가 일치한 그야말로 윈-윈 수교"라는 평가도 있다.

외교 당국 내 쿠바와의 수교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에 나섰던 1996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공식적인 수교 교섭 제안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이뤄졌다.

수교 협상의 특성 상 워낙에도 기밀 유지가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쿠바 측이 특히나 보안에 민감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북한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도 수교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노출될 경우 북한의 방해 공작이 우려되는 만큼 속전속결, 로키(low key)로 진행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이번 수교는 미국 뉴욕에서 양국 유엔 대표부가 외교 공한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한국은 그간 쿠바와 외교 관계가 없었지만 뉴욕의 양국 주유엔 대표부 채널과 멕시코 주재 양국 대사관 채널의 두 비공식 채널로 협의했다고 한다. 정부는 동맹인 미국에도 수교 12시간 전에야 공식적으로 수교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지난해 5월 한국과 니우에가 수교를 체결할 때는 장관 간 문서 서명 뒤 악수를 하는 기념사진 등이 배포됐지만, 이번 쿠바와의 수교 때는 관련 사진 한 장 없었다. 그만큼 막판까지 보안에 유의했다는 뜻이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 AP. 연합뉴스.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 AP. 연합뉴스.

엠바고 없이 전격 발표

통상 이런 '대형 사건'의 경우 충실한 보도를 위해 이뤄지는 엠바고(보도 유예) 조치도 이번에는 없었다. 외교부 내에서도 1시간 내외의 여유를 두고 출입기자단에 엠바고로 수교 사실을 알리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결국 양측의 외교 공한 교환을 통해 수교가 확정된 뒤에야 보도자료를 통해 일괄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데다 엠바고 관행에 익숙치 않은 쿠바의 입장을 배려한 것으로, 수교 사실이 14일 밤 10시 30분쯤 갑자기 알려지게 된 배경이다.

합의는 전격적이었지만, 길게는 20여년, 짧게 봐도 8년 전부터 지속해서 한국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쿠바와 국교 정상화를 하자 한국도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외교 수장으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하는 등 수교 추진에 속도를 냈다.

이후 미국에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남북 관계를 중시했던 문재인 정부 출범 등을 거치며 수교 추진에는 부침이 있었다. 그러나 쿠바와 수교를 추진한다는 정부의 기본 입장은 수십 년째 변함이 없었다.

지난 2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시민들이 연료를 넣기 위해 차를 세워둔 모습. AP. 연합뉴스.

지난 2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시민들이 연료를 넣기 위해 차를 세워둔 모습. AP. 연합뉴스.

유엔서 비공개 장관급 회담도

그러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다시 수교 노력을 본격화했다. 지난해 5월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이 과테말라에서 쿠바 외교 차관과 만나면서 논의의 물꼬를 텄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에서도 박 전 장관은 브루노 로드리게스 파릴라 쿠바 외무장관과 비공개로 회담했다.당시 외교부는 북한을 자극할까 우려하는 쿠바의 입장을 존중해 외교장관 회담 사실을 대외에 공개하지 않고 신중하게 접근했다.

외교 소식통은 "쿠바 측이 결단을 내려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기엔 윤석열 대통령의 강한 의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쿠바와의 수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뤄내야 할 목표라는 대통령의 인식이 강했고, 외교 당국의 다양한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한국은 지난해 11월 유엔 총회에선 미국의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 해제를 촉구하는 결의안에도 기존 입장을 유지해 찬성표를 던졌다.

정부는 측면 지원을 염두에 둔 여러 조치도 조용히 이행했다. 지난해 9월 로마 바티칸시국 성 베드로 광장에 삼성전자가 설치한 옥외 전광판이 들어섰는데, 쿠바와 수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의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외교 당국의 포석이 깔려 있었다는 후문이다. 앞서 2014년에도 교황청은 미국과 쿠바의 수교 착수를 중재했다.

지난해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삼성전자 옥외 전광판이 설치된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삼성전자 옥외 전광판이 설치된 모습. 연합뉴스.

한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한국과 쿠바의 전격적인 수교와 관련한 중앙일보의 질의에 "한국은 자국 외교관계의 성격을 결정할 주권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존중한다(respect)"고 밝혔다. "추가적인 정보는 한국 정부에 문의하라(refer)"면서다. 지지나 환영의 표시는 아니었다.

이는 미국이 쿠바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현 상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가운데 쿠바 정부에 심한 반감을 갖고 있는 미국 내 쿠바계 유권자들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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