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한·중·일 고구마 맛탕 빠스, 닮은 듯 다른 역사

중앙일보

입력

 중국의 맛탕 '빠스(拔絲)'. 빠스를 식힌 후 뒤집으면 겉에 묻은 설탕이 실처럼 늘어진다. 인민망(人民網)

중국의 맛탕 '빠스(拔絲)'. 빠스를 식힌 후 뒤집으면 겉에 묻은 설탕이 실처럼 늘어진다. 인민망(人民網)

고구마 빠스는 우리한테도 너무나 익숙한 간식이다. 우리말로는 고구마 맛탕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맛탕을 약과나 강정처럼 우리 고유 간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맛탕 대신 빠스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맛탕은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있다. 다만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만드는 법도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맛탕을 엉뚱하게 대학 고구마, 즉 다이가쿠 이모(だいがく いも)라고 한다. 중국은 빠스(拔絲)다. 실을 뽑는다는 뜻이다.

일단 우리 맛탕이나 일본 다이가쿠 이모는 그 뿌리를 중국 빠스에서 찾는다. 중국의 고구마 설탕 조림이 한국과 일본으로 퍼져 발전했다. 그런데 이름과 나라별 유행 과정과 시기에는 서로 다른 경제적 배경과 음식문화가 반영되어 있으니, 맛탕을 통해 세 나라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맛탕이 퍼진 시기는 대략 1950~60년쯤으로 본다. 이 무렵 다수의 일간 신문에 간단한 중국요리, 빠스띠과 만드는 법이라며 맛탕 요리법이 소개돼 있다. 유행 시기가 일본에 비해서는 대략 50년 이상, 중국보다는 훨씬 더 늦었는데 이유가 있다.

사탕수수 재배로 설탕을 자체 조달했던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은 설탕이 원천적으로 귀했고 중국, 일본과는 달리 조선 후기 고구마는 구황작물로 폭넓게 퍼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귀한 수입 설탕을 구황작물인 고구마에 쓸 수는 없었기에 설탕이 어느 정도 대중화될 때까지 맛탕의 등장이 늦어졌다. 그렇기에 맛탕은 요리가 아닌 아이들 군것질로 발달했다.

 '대학 고구마'라는 의미를 지닌 일본의 맛탕 '다이가쿠 이모( だいがく いも )'.  Foodie(フーディー)

'대학 고구마'라는 의미를 지닌 일본의 맛탕 '다이가쿠 이모( だいがく いも )'. Foodie(フーディー)

일본 맛탕, 다이가쿠 이모의 유행은 또 다르다. 일본에서 맛탕의 등장은 1910~20년대 무렵으로 추정한다. 당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대학생들의 간식, 내지는 요깃거리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 무렵 동경대 혹은 와세다대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군고구마를 팔다 설탕 조림이라는 부가가치를 더해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전환한 것인데 대학 고구마(大學 いも)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일본 맛탕이 생겨난 데는 또 다른 경제 사회적 배경도 있다. 고구마는 일본에서도 18세기 흉년으로 인한 대기근 때 백성을 굶주림에서 살려낸 구황작물이었다. 고구마가 보급되면서 먹을 게 떨어지면 입을 줄이기 위해 어린이부터 굶기는 마비키(まびき)라는 악습이 사라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는 이렇게 단순한 군것질거리가 아닌 비상시의 양식이었다. 그러다 19~20세기 오키나와와 식민지 타이완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로 설탕 공급이 늘었고 대학생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일본 맛탕 다이가쿠 이모가 나오게 됐다. 구황작물에서 대학생 나름의 고부가가치 간식으로의 전환인데 여기에는 제국주의 일본 경제도 한몫한 셈이다.

그러면 맛탕의 원조인 중국 빠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국 및 일본과 달리 빠스는 원래 주전부리 간식이라기보다는 정식 요리의 성격이 강했다. 디저트에 가까운 후식 개념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빠스를 산둥요리(魯菜)의 계보로 분류한다.

빠스가 산둥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세기 중후반 화북지방의 대기근 때 특히 피해가 심했던 산둥성을 굶주림에서 구한 것이 고구마였기에 산둥에 고구마가 널리 퍼졌다. 반면 설탕 조림은 청나라 후반까지도 고급 음식에 속했기에 자금성이 있는 북경 등지에서 주로 발달했다. 일정 부분 산둥요리와 계보를 같이하는 지역이다.

어쨌든 실을 뽑았다는 뜻의 빠스(拔絲)가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청나라 말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 시절의 문헌인 『소식설략(素食說略)』에 껍질 벗긴 마를 기름에 튀긴 후 설탕물로 졸이면 기다란 실이 뽑힌다는 설명이 나온다. 빠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는데 이때 쓰인 재료는 고구마가 아닌 산약(山藥), 우리 이름으로는 마였다. 그러니 고구마 맛탕인 빠스띠과(拔絲地瓜)는 산약인 마를 싸고 흔한 고구마로 대체하면서 발달했다. 참고로 땅에서 나는 열매라는 뜻의 띠과(地瓜)는 고구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구마 맛탕 빠스띠과는 청나라 말에 뒤늦게 생겼지만 빠스산약처럼 마나 토란 등의 각종 재료를 튀겨 설탕에 졸인 요리는 역사가 오래됐다. 일단 이런 요리법은 청나라 초 산둥성 출신의 작가가 쓴 『요재지이(聊斋志異)』라는 문헌에 보인다. 맛탕의 뿌리로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재료가 고구마가 아니었을 뿐 빠스는 청나라 초에도 있었던 고급요리였던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당시대에도 빠스산약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나라 때 반군을 이끈 이밀이라는 장수가 빠스산약을 먹다 입을 데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수당시대일까?

당나라는 중국에 사탕수수가 전해지면서 여기서 원당을 뽑는 제당 산업이 발달했던 시기다. 그렇기에 원당을 이용한 요리가 만들어졌는데 과일에 엿물을 입힌 탕후루, 마를 설탕으로 졸인 빠스산약도 여기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본다. 중국 빠스는 이렇게 굶주림을 구한 구황작물과 고급 요리가 결합하며 생겨났다. 한국 맛탕, 일본 대학 고구마, 중국 빠스의 같은 듯 다른 역사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더차이나칼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