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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욕망 열차’에 정치가 올라탈 때

중앙일보

입력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한국은 사기 공화국이다. 2022년 전체 범죄 중 22.6%가 사기였다. OECD 국가 중 1위다. 몇 년 전 검찰 수사관이 쓴 『속임수의 심리학』이란 책에는 사기에는 세 가지 심리가 활용된다고 한다. 욕망, 신뢰, 불안. 선거가 사기라면 지나친 냉소지만, 선거판에 대입하면 ‘신뢰=팬덤’ ‘불안=흑색선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 심리 중 핵심은 ‘욕망’이다. 선거철 쏟아지는 개발 공약은 유권자의 욕망을 자극한다.

현실성 의심나는 ‘노후도시 특별법’
교통·이주 대책은 제대로 마련했나
질러 놓고 보자는 선거철 개발공약
사기극 아닌지 유권자가 판단해야

공약이 으레 그런 것 아니냐고? 그렇긴 하다. 하지만 공수표가 남발되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숱한 사례가 있지만, 최근 나온 것 중에는 ‘노후 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들겠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점투성이 법을 총선을 넉 달 앞둔 지난해 말 여야 합작으로 통과시켰다. 선거에 목맨 무책임 정치가 출발시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다.

이 법은 지난 대선 때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 주민들을 상대로 한 윤석열 대통령의 재건축 공약에서 시작됐다. 조성 30년이 넘은 1기 신도시의 용적률은 200% 정도다.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상 아파트 지역(제3종 일반주거지역)의 용적률 한도는 300%. 상한선을 도정법의 1.5배(450%)로 늘린 것이 특별법의 핵심이다. 일반주거지역을 준주거지역으로 바꾸면 70층짜리 주상복합도 들어설 수 있다.

문제는 현실성. 기반 시설과 이주 대책이 모호하다. 각각 40만과 30만 명 수용을 전제로 만든 분당과 일산 신도시는 주변에 위성 주거단지가 들어서면서 교통과 도시 인프라가 이미 포화 상태다. 서울에 직장이 있는 주민들은 새벽 출근과 심야 퇴근을 감내한다. 용적률 제고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주는 더 큰 문제다. 이미 고밀도인 신도시를 헐었을 때 발생하는 이주민은 저밀도 지역의 재개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주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셋값은 물론이고 집값까지 불안해질 수 있다. 이들을 수용할 주거 단지를 새로 만드는 것도 힘들다. 땅도 없고 시간도 걸린다. 어찌어찌 마련해도 추후 활용 방안이 마땅찮다.

구획을 나눠 차근차근히 하면 된다고? 하지만 ‘욕망의 전차’가 기다려줄까. 기존 아파트를 허물고 다시 짓는 데 3년쯤 걸린다고 치자. 도시 전체를 10등분해 사업 공백 없이 군사 작전하듯 착착 추진해도 최소 30년은 걸린다. 그때 닥칠 인구 감소를 생각하고나 이런 정책을 짰는지 궁금해진다.

이런 문제를 눈 밝은 의원들도 모르진 않았다. 지난해 2월 법안이 발의된 후 맹성규 민주당 의원은 “실현 가능성 없는 희망 고문법”이라고 했고, 김희국 국민의힘 의원은 “특별법은 1기 신도시 양두구육법”이라고 지적했다. 둘 다 국토부 차관까지 역임한 전문가들이다. 이때만 해도 나름의 합리성이 작동하는 듯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당 지도부의 연내 통과 독려에 휩쓸리고 말았다. 오히려 왜 1기 신도시에만 특혜를 주느냐는 불만에 대상이 전국 108곳으로 늘어났다. 해당 지역 출마 의원들은 홍보물에 자신의 치적이라 자랑할 것이다.

특별법이 믿을 만한 약속인지는 유권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단, 지금 같은 부동산 경기로는 서울 시내나 분당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재건축 사업성이 낮다는 사실만은 알았으면 한다. 정부는 안전진단 완화로 재건축 걸림돌을 치웠다고 생색내지만, 지금 재건축 사업 부진은 규제 때문이 아니라 건설비 상승 및 집값 하락 때문이다. 현재로선 안전진단 완화 카드는 고가 노후 아파트에만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재건축 완화 정책은 오히려 신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던 리모델링 사업에 차질을 주고 있다. 이제라도 재건축으로 돌아서자는 주장 때문이다. 주민들 스스로 어렵게 찾은 주거 개선 방법이 갑자기 나타난 ‘욕망 전차’에 치인 꼴이다.

이 와중에도 공수표 공약은 계속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목련이 피는 봄이 오면 김포는 서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리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동료 시민들께서 원하는 대로” 하겠단다. 이미 파투(破鬪)난 서울 편입 카드를 다시 꺼내는 것도 우습지만, 이 대목에서 ‘동료 시민’의 어휘 구사는 어이없다. 존 F 케네디는 “동료 시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라고 했다. ‘동료 시민’은 이럴 때 쓰는 단어다. 욕망이 아니라 책임과 연대가 필요할 때.

욕망의 열차에 편승한 공약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국토 균형개발, 인구 감소 대비 같은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엔 눈감아 버렸다. ‘갈라치기’라는 비난을 받지만, ‘여성 병역’ ‘무임승차 폐지’처럼 우리 시대의 불편한 화두를 던진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공약에 그래도 눈길이 가는 것은 거대 양당의 이런 무책임 때문이다. 유권자의 욕망에 무책임한 정치가 올라타면 그게 바로 사기가 된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이유정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