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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서서, 청년은 앉아서…고향 가는 열차 '희한한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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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설을 앞둔 8일 오전 서울역 KTX 매표소 앞. 여수에 사는 정모(74) 씨가 전광판을 가리키며 ″모두 매진″이라고 말했다. 정세희 기자

설을 앞둔 8일 오전 서울역 KTX 매표소 앞. 여수에 사는 정모(74) 씨가 전광판을 가리키며 ″모두 매진″이라고 말했다. 정세희 기자

입석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좀 끊어주세요.

설 명절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서울역 KTX 교통약자 우선 청구 매표소. 최모(78)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을 만나러 동대구역에 가야 했지만 모든 열차가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예매가 지난달 진행됐었다는 대답에 그는 “전화기로는 전화만 하는 노인네들은 어떻게 인터넷으로 표를 끊냐”며 “명절에 가족들 만나러 가는 걸 어렵게 해두면 어떻게 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이번 설 명절 앞두고 비대면 표 예매에 익숙하지 않은 노령층은 여전히 현장에서 표를 사려고 기차역을 직접 방문하고 있었다. 이미 설 연휴 기간 표가 매진됐지만, 이들은 어쩌다 나온 취소 표를 하늘의 별 따기식으로라도 구하기 위해 역을 떠나지 못했다. 서울역에서 부산역으로 가려던 허모(71)씨는 KTX·무궁화호·새마을호 모두 입석까지 매진이라는 역무원에게 “아무거나 좋으니 좀 끊어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표를 구하지 못한 그는 “어떻게 온종일 매진이냐”며 한숨을 쉬고 발걸음 돌렸다.

현장 매표를 하려는 사람이 몰리며 대기 시간이 길어지자 곳곳에서 불만도 터져 나왔다. 이모(70)씨는 “표가 없을까 봐 걱정돼 죽겠는데 상황을 모르니 몇십분 째 기다리고만 있다”며 혀를 찼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지난달 8~11일 나흘간 온라인으로 명절 승차권 예매를 진행했다. 철도공사의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코레일톡’)과 인터넷 홈페이지(‘레츠코레일’)를 통해서다. 올해는 노인·장애인·국가유공자 등 교통약자에 대한 할당 좌석 비율을 10%에서 20%로 늘리고, 1월 8~9일 이틀간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별도 예매를 실시했다. 또 전화·인터넷 예매 진행 비율을 각 10%씩 배정하는 등 예매 창구도 늘렸다.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비대면 예매는 그림의 떡이었다. 특히 권역별 예매 날짜가 달라 혼란이 가중됐다. 교통약자 기준으로 8일에는 경부·경전·동해·충북·중부내륙·경북선, 9일에는 호남·전라·강릉·장항·중앙·태백·영동·경춘선 예매를 각각 진행했기 때문이다.

편리한 인터넷 예매? 자식 없인 어려운 숙제

한 노인이 서울역 매표소에서 고향 가는 KTX표를 구하고 있는 모습. 이영근 기자

한 노인이 서울역 매표소에서 고향 가는 KTX표를 구하고 있는 모습. 이영근 기자

그나마 표 예매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식의 도움을 받았을 경우다. 병원에 들렀다가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는 김모(70)씨는 “아들이 표를 예매해주지 않았으면 남은 표 사려고 몇 시간씩 줄 서야 했을 것”이라며 “지금도 걱정됐는지 계속 전화 오고 문자가 오는데 자식 없었음 집에도 못 갈 뻔했다”고 말했다.

여수에 사는 정모(74)씨는 역에서 현장예매로 입석 예매를 했지만 며느리가 “앉아서 가시라”며 온라인 표를 구해줬다. 그나마도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기차역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 어렵게 표를 손에 넣은 경우도 있다. 서울에서 병원을 갔다가 다시 울산으로 돌아간다는 강경성(65)씨는 지난달 인터넷·전화 예매를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직접 역에서 3시간가량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뿐 아니라 전화도 다 먹통이고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고 토로했다.

동대구역행 KTX에서 만난 권상근(76) 씨는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지 못해 1시간 40분을 서서 가야만 했다. 권 씨가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 이영근 기자

동대구역행 KTX에서 만난 권상근(76) 씨는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지 못해 1시간 40분을 서서 가야만 했다. 권 씨가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 이영근 기자

서울역 동대구역행 기차안에서 만난 이모(70)씨가 열차 칸 사이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있다. 그는 한 달 전 서울역에서 현장예매로 입석 표를 겨우 구했다. 이영근 기자

서울역 동대구역행 기차안에서 만난 이모(70)씨가 열차 칸 사이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있다. 그는 한 달 전 서울역에서 현장예매로 입석 표를 겨우 구했다. 이영근 기자

그러다보니 온라인으로 표를 예매한 젊은이는 좌석에 앉아서, 입석 표를 겨우 손에 넣은 노인이 서서 가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딸을 만나러 동대구역에 가는 권상근(76)씨도 그랬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지하철처럼 노약자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 표를 구하지 못하면 불편하게 가야 한다”며 “인터넷 예매든 뭐든 노인 할당을 조금 더 늘려주면 좋을 거 같지만, 젊은 사람들도 표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격차를 당장 해소하기는 어려운 만큼 노령층에 대한 다양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당장 노인들이 인터넷을 배우고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면서 “명절에는 오프라인 예매 물량을 조금 더 확보하는 방식 등 고령층을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진석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나서서 교통약자 몫의 표 비중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라면서 “코레일 입장에선 교통약자 할인 등을 확대할 유인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부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어르신들 온라인·모바일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안내 책자를 만들고 교육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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