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총선 결과 관계없이 협력적 한·일 관계 이어가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이혁 전 베트남 대사, 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이혁 전 베트남 대사, 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올해는 20억여 명이 속한 70여개 국에서 선거가 열리는 ‘선거의 해’다. 미국·인도·러시아·인도네시아·영국 등 국제적으로 영향력 큰 나라들의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지난 1월에는 대만의 주권을 우선시하는 친미 성향 여당인 민진당의 라이칭더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면서 이 지역 긴장과 미·중 대립 추이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만들어졌다. 미국의 11월 대선은 바이든·트럼프 재대결 가능성이 높고 누가 당선될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어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일 관계, 한·미·일 협력 기초
한국 외교 성공 여부의 가늠쇠
양국 관계 증진, 기시다 노력 커
대일 협력 심화·확대 노력 필요

피폐한 소모전 양상을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하여 가자 전쟁의 발발로 미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의 고립주의가 강화되고 민주주의 진영의 결속이 약화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9월에는 일본 자민당 총재의 3년 임기가 만료된다. 여당인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선출되기 때문에 한·일 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해온 기시다 총리의 총재 재선 여부는 한국에도 중요하다.

트럼프 진영과 네트워크 구축 필요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국내적으로는 핵심 외교 이슈를 둘러싼 여야 간 입장 차이와 지지층 간 분열 구도에 더하여 북한이 전례 없이 적대적이고 도발적 행동을 보이는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의 4월 총선은 내정뿐 아니라 외교안보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내재한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한국 정부의 외교 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한국 정치가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민간 기업과 국민의 노력으로 경제 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지만, 외교안보는 민간에 맡길 수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정부의 책임은 막중하다. 우리가 견지해온 기존의 외교 펀더멘탈을 공고히 하면서 시대 흐름에 부응하는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국익 지향적 외교가 요구된다.

첫째, 한국은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한·미 동맹, 한·일 관계, 한·미·일 협력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11월 미국 대선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미 동맹이 불가결하다는 데는 여야 간에 대체로 인식이 수렴되어 있지만 정서적인 괴리는 뿌리 깊게 존재한다. 특히 트럼프 당선 시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에 대규모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거나 북한과의 위험한 거래를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경우 국내적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되고 친미 대 친중 등 진영적 갈등을 촉발해 우리 외교 기조를 흔들 가능성이 잠재한다. 일본 정부가 아베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 간 개인적 관계 강화를 통해 미·일 동맹을 비교적 원만히 유지할 수 있었던 사례를 참고하여 대선 전에라도 트럼프 진영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일 관계는 그 자체로서뿐 아니라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증진의 연결 고리임을 고려할 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우리 정부가 기존의 협력적 한·일 관계의 틀을 견지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한 조치를 결단한 것만큼 우리 외교 성공의 키를 쥐고 있다. 앞으로 기시다 총리 이상으로 한·일 관계 증진에 열의를 가진 일본 총리가 나오기 어려운 만큼 정부가 현재의 한·일 관계를 견지하고 심화·확대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일본 경제는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고 2023년에는 엔저 영향으로 독일에 추월당해 세계 4위로 하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이제 한국을 경쟁국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민감한 한·일 이슈에 대해 진전된 자세를 보일 가능성은 매우 작을 것이란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중국,‘평화적 중재자’ 자처

둘째, 국내외 상황에 비추어 한·중 관계 증진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1월 말 태국 방콕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의 12시간에 걸친 협의에서 후티 반군이 민간 상선 공격을 중단하도록 중국이 외교적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미·중 관계가 기술·경제 분야에서는 경쟁하면서 국제 분쟁에서는 협의와 협력의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중 ‘신냉전’은 과거 미·소 냉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국은 세계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소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통합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이를 위해 한국·베트남·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대리전쟁도 불사했다. 중국은 ‘내정 불간섭’을 표방하며 자국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있어 가치·이념을 내걸지 않고 있고 국제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 아래 다른 나라도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미·소 냉전에서 완승한 미국은 과거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자국이 구상하는 세계 질서(Pax Americana)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크라이나와 가자 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행 질서를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고 있다. 반면 중국은 큰 부담 없이 ‘평화적 중재자’로 자처하면서 외교적 공간을 확대해 왔다.

대중 관계개선 안 되면 미·일에 뒤져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장기 집권과 공산당 지배에 해가 되는 어떤 외부적 압력에도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태세이다. 특히 유례없는 경기 부진에 국민 불만이 잠재해 있는 현 상황에서는 더욱 경직된  자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중시 외교가 중국의 경계심을 초래하여 한·중 관계가 기대만큼 진전되지 않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중국 인권 문제에 한국보다 더 분명하고 일관된 자세를 견지해 온 일본은 한국과 달리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 시진핑·기시다 간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중국은 미·일 등 강대국 그룹과 동일 선상에서 한국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이 무리하게 한·중 정상회담에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미·일보다 사려 깊고 유연하게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지 않으면 미·일에 뒤처질 수 있다. 가치·이념과 국가적 자존심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중견국인 한국이 추구해야 할 외교는 강대국들보다 더 국익 중심이 되어야 한다. 특히 어려운 우리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반도와 접경한 중국이 번창하든 쇠퇴하든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 한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국가 운영 역량을 발휘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모범사례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고 세계적 자유민주주의 확산에 공헌하는 길이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 리셋 코리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