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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일 테노레’의 모던 청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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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오는 25일까지 초연 중인 창작 뮤지컬 ‘일 테노레’(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세브란스 의전 출신 테너 이인선(1906~1960)을 모티브로 삼았다. 1948년 우리나라 첫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공연의 중심이었던 그를 바탕으로 조선 첫 테너가수 윤이선(홍광호·박은태·서경수 분)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의사가 되길 바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청년 이야기가 깊이를 더하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조선인들의 자유로운 공연이 억압되는 상황에서 청년은 무대에서 노래하길 소망하고 또 다른 주인공 진연(김지현·박지연·홍지희 분)은 항일 메시지 전파를 꿈꾼다. 절체절명의 항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진연과 이선의 갈등이 선택의 고민을 관객에게 던지며 청춘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키워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첫 테너가수를 꿈꾸는 윤이선을 중심으로 청춘의 열정과 애환을 그린 뮤지컬 ‘일 테노레’. [사진 오디컴퍼니]

일제강점기에 조선 첫 테너가수를 꿈꾸는 윤이선을 중심으로 청춘의 열정과 애환을 그린 뮤지컬 ‘일 테노레’. [사진 오디컴퍼니]

미래 독립조국의 외교관을 꿈꾸는 진연은 온전히 창작된 인물이다. 오합지졸 극회를 조련하고 남자 친구의 기까지 북돋우며 완벽한 무대를 준비하는 100년 전 여성이라니. 요즘 관객 눈높이에 맞춘 과한 설정으로 보이겠지만 현실엔 그보다 더한 ‘모던 걸’들이 있었다. 3·1 운동 후 중국에 망명해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권기옥(1901~1988), 조선 최초의 유화 전시회를 열고 여성 미술교육에도 힘썼던 나혜석(1896~1948) 등이다. 개척자 없이 후발대가 없듯이 누군가는 ‘처음’에 기꺼이 뛰어들었고 시련을 견뎠다.

일제강점기를 그려내는 대중문화의 관점은 2008년 영화 ‘모던 보이’(감독 정지우) 이후 다채로워졌다. 그전까지 억압과 항일의 비극적 서사 위주였다면, 경성의 신식 문물이 전면에 조명되면서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욕망과 좌절을 섬세하게 그리는 시선이 늘었다. 이기적 개인이 사심을 추구한다 해도 시대와 필연적으로 불화하는 ‘모던 경성’의 서사는 2018년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함께 대중에게도 깊이 각인됐다. 뮤지컬에서도 이전 세대가 명성황후, 안중근 등 실존 인물들의 고뇌와 결단에 초점을 뒀다면 ‘일 테노레’에 와서 1930년대라는 배경은 보편적인 청춘의 고민을 극단화시키는 설정에 가깝다.

“가네, 멀어지네/ 빛바랜 희망이 됐네/ 나의 오 나의/ 찬란하던 꿈이여”(메인 테마 ‘꿈의 무게’). 구습의 조선이 망한 자리, 식민지 경성에는 새로운 교육과 문물이 밀려왔다. 누군가에겐 기회이자 도전이었고 그걸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반감이 독립의 열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대를 소환하면서도 현재 청춘의 갑갑함을 어루만지는 ‘꿈의 무게’가 100년을 거슬러 울림을 준다. “우리는 모두 진흙탕에 있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올려다보기도 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려 극 중 주인공들을, 나아가 어렵사리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