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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이산가족 한조차 외면한 북한의 ‘통일 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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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기덕영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 황해도지사

기덕영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 황해도지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이며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말하며 일방적으로 남북 관계 파탄을 선언했다. 김정은의 이런 발언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김정은의 도발적 발언은 4월 총선을 앞둔 대남 북풍 공세로만 보기에는 실향민이자 이북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충격적이다.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의 74%(9만여 명)가 고인이 됐다. 그나마 생존자도 70대 이상이 84%(3만여 명)일 정도로 이제나저제나 상봉을 고대해온 이산가족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김정은, 남북기본합의서 부정
이산가족 상봉 꿈마저 짓밟아
북녘 동포의 인권과 자유 지지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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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여 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생존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 하루속히 이산의 아픔을 치유해 나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은 적대적 태도로 돌변해 또다시 이 문제를 논의조차 할 수 없게 아예 대화의 빗장을 잠가버렸다. 1971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이념·정치·진영 논리가 아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기반해 인도적 차원에서 절박한 현안으로 추진해 왔다.

더 늦기 전에 머리를 맞대고 통일을 논의해야 할 판에 김정은은 그들만을 위한 봉건 세습 정권 체제 유지를 위해 이산가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대남 적대 정책을 극대화하면서 2500만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김씨 정권의 만행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당국은 민족·통일을 일거에 부정하며 한순간 천만 이산가족을 이산의 고통에서 이산의 절망으로 내팽개쳤다. 이러한 반인륜적 선언의 문제를 국제사회와 함께 세계만방에 알려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괴이할 정도로 의문이 하나 든다. 북한을 추종하는 주사파들은 지금 김정은의 민족과 통일 부정 발언에 왜 침묵하나. 그동안 진심으로 통일을 외쳐왔다면 김정은의 ‘통일 파기’ 선언에 반발하고 성명서 하나쯤은 내야 하지 않는가. 주사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을 줄곧 부정해 왔다. 이제는 북한식 적화통일조차 부정하는 것인지, 그들의 진짜 속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 규정하고, 핵무기 사용과 전쟁을 언급하며 한반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북한은 ‘도발→협상→보상→파기’라는 전략으로 본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챙겨 왔다. 하지만 더는 이러한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정부는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흔들림 없이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확고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국방력과 한·미·일 삼각 협력 체계를 바탕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담대한 구상’ 원칙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타협은 없다는 원칙을 지킨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880만 이북도민은 흔들림 없는 대북정책을 지지하면서 북한이 대화와 협상에 나오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북도민 1세대 어르신들은 “공산주의와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며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뒤로 한 채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자유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 의지와 실천 정신을 이어 나가야 한다.

설 연휴를 앞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권 유린으로 고통받는 북녘의 형제자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국제사회와 공조하면서 긴밀한 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 스스로가 인권과 민주화를 자각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해 걸어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는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북도민은 북녘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함께할 것이다. 북녘 고향에 대한 뜨거운 애향심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자유·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고, 철저한 안보 의식을 바탕으로 평화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데 힘을 보탤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덕영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황해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