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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탄소중립 시대, 신기술·혁신 절실한 철강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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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

세계 4위이자 일본 최대 철강업체인 일본제철이 지난해 12월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을 141억 달러(약 18조8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US스틸이 일본제철에 인수되는 걸 막겠다고 공약했다. 미국 산업과 근로자 이익을 최우선하겠다는 취지다.

30년 전 빌 클린턴 대통령도 ‘미국 우선(America first)’ 정책을 추진했다. 1992년 US스틸이 중심이 된 미국 철강업체들이 한국의 포스코를 미국 상무부에 반덤핑 제소한 게 대표적 사례다. 1년여의 조사와 현지 실사, 포스코의 합리적 반박 자료와 설명에도 상무부는 미국 철강업체들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포스코 전략담당 상무이사로 재직하던 필자는 부당한 조치임을 호소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갔었다.

일본제철, US스틸 인수 발표하자
‘미국 우선’ 트럼프 “인수 막겠다”
혁신 주도 미국 뉴코아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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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공화당, 클린턴은 민주당. 다른 것 같지만, 선거에서 표를 얻고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쓴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본다. 다만 트럼프는 이를 정치적 모토로 내세워 명시적으로 추진했고, 클린턴은 암묵적으로 실행한 방법론적 차이만 있을 뿐이다. 트럼프 후보의 공약 중엔 한국에 위협적인 것들이 많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꿰뚫어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철강산업은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의 8%일 정도로 비중이 높다. 2050년 ‘온실가스 순 제로 배출’ 목표를 달성하기가 가장 어려운 산업군에 속한다. 환경 규제에 대응해서 탄소중립 철강제품 기술과 생산 체제를 갖추는 기업은 살아남고 성장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여러 가지 기술들이 제안되고 있으나, 두 가지 방법이 탄소중립을 위한 장기적 해법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첫째, 세계 철강 생산의 71%를 차지하는 고로 공정 설비를 유지한 채 조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활용·저장하는 방법이다. 둘째, 직접 환원철(DRI) 기술과 전기로(EAF)를 결합한 방법이다. 전자는 기술 개발의 높은 난도와 포집된 이산화탄소의 운송·저장 등 현실적 제약 해결이 만만치 않아 보이고, 성공하더라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60% 정도 감축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이미 상당 부분 상용화됐다. DRI 공정에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천연가스 대신 수소로 대체하고 신재생 전력을 사용하면 철강산업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95%를 감축할 수 있다. 이는 철강산업에서 지난 100여년 지속해온 고로 방식에서 새로운 친환경 기술로 전환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DRI+EAF 기술 개발을 선도하는 미국 철강회사가 뉴코아(Nucor)다. 1969년 소규모 전기로 업체로 출발했지만, 기술 개발과 경영 혁신으로 미국 최대 철강업체로 성장했다. 2016년 루이지애나에 세계 최대(연 250만t 생산)의 직접 환원철 공장을 건설했고, 2021년엔 세계 최초로 온실가스 순 제로 철강제품을 생산했다. 2030년에는 철강산업 평균 온실가스 배출량의 77%를 감축하겠다는 획기적 계획을 발표했다. 기후 위기를 맞아 탄소 중립이 기업의 핵심 가치이자 생존 이슈가 된 시대에 뉴코아가 세계 철강업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보니 세계가 주목한다.

뉴코아는 또 고급강·특수강 등 첨단제품 생산기술 개발을 가속하기 위해 일본 2위 철강회사인 JFE와 협력 관계를 맺었다. 여기에 US스틸과 일본제철의 합병까지 성사되면 미·일 간에 막강한 철강 협력체가 형성되고, 미국 철강 산업이 되살아나는 데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US스틸은 일본제철이 보유한 업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고급강 생산 능력을 동원해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노릴 것이다. 일본제철은 미국에 생산 거점을 만들어 덤핑 문제를 우회적으로 해결하는 동시에 US스틸이 2020년부터 시작한 미국 내 전기로 사업을 더 확장해 뉴코아와 경쟁 구도를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탄소 중립 시기를 앞당기는 윈윈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보호주의 무역 정책이 강화되는 시점에 벌어지는 글로벌 철강 시장의 블록화는 한국의 철강업체와 산업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철강산업에 던지는 교훈을 곱씹어볼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자영 전 SK이노베이션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