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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혜의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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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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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SNS 일상사에서 우리는 타인보다 자신을 더 많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의 반응, 나의 성정이 바뀌고 때로 망가지기도 하는 것을 수시로, 그리고 긴 기간에 걸쳐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좋아요’와 ‘슬퍼요’를 누르는 나의 시간 간격을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다면 나를 사이코패스라고 여기지 않을까 두려웠다. 1초 전에 누군가의 부음을 접하고 우는 표정을 지었던 나는 다른 사람이 올린 여행 사진에 열광한다. 이 틈 사이에서 오랫동안 정신이 분열될 것 같았던 나는 이제는 분열의 감각마저 사라지는 경지에 들어섰다. 아무도 나의 실시간 반응을 지켜보지 않으니 나도 나 자신을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일상화된 SNS, 성정 망가지고
짧고 얕은 감정 반복에 길들어
단톡방 무반응, 거부로도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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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감정이 일상을 지배한다. 뇌는 초 단위로 양극단을 널뛰면서 통합된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다. 짧은 시간에 서로 먼 감정 사이를 광활하게 오가는 것은 얕게 부유하는 것과 같다. 표현할 수 있는 정서는 희로애락의 이모티콘으로 표준화되어 있다. 표준화는 생각의 회로를 멈춰 세운다.

손가락은 바쁘다. 반면 머리는 바쁘기도 하고 한가하기도 하다(두 감정을 오가는 자신의 분열을 붙잡아두려고 바쁘나 사실 아무 생각이 없기도 하다). 답글을 달지만 이 행위에는 약간 꺼림칙함이 있다. 진심을 다한다 해도 그런 감정 소모에는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으로 충분하기에, 이 시간 쓰기의 행동은 내가 지금 거짓에 속해 있다고 말해준다.

우리는 동어반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겹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작가가 같은 동사를 계속 반복한다면 더 나은 어휘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가 의문을 품을 것이다. 번역가 류진오는 작가가 수사적 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쓴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에 멀미가 난다고 호소한다. 그는 어떤 책을 번역하던 중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반복을 피하고 싶어 웁니다. 울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눈물바다가 됩니다. 훌쩍입니다.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콧등이 시큰거립니다. 대성통곡합니다. 오열합니다. 영혼의 둑이 터지면서 그간 차마 소화하지 못했던 것들을 눈물과 함께 방류합니다.” 번역가는 원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 상투적 어휘를 못마땅해하면서 살짝 표현을 가공하기도 한다.

SNS는 반복이다. 시시각각 서사의 속내는 변하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짧고도 얕은 감정의 반복이다. 이 반복을 스스로 애석해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런 순응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점점 장사꾼의 감정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무엇을 팔진 않지만 손님 한 명이 가고 나면 곧이어 다음 손님을 받는 식이다. 상행위에 길들여진 사람은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거의 품지 않는다. 시간 쓰기와 정서 쓰기에 대해 개인에게 주어진 자율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부고가 올라오는 페이스북을 보자. 비극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다 보면 평정심을 지키고 싶다. 우리는 덮어씌울 만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것은 빠르고 직접적인 감각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맛있는 음식이나 술이 위로가 된다. 즉 이성으로 곱씹어야 할 것이 감각으로 희석된다. 이처럼 사건 경험이나 목격의 간격을 짧게 유지하다 보면 폐기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난다. 바꿔 말해 쓰레기가 되는 감정들이다.

최근 나는 친구 동생의 부음을 들었다. SNS가 아니고 장례가 끝난 후 직접 만나서 들었다. 2시간 동안 대화하며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다가 웃었다. 일희일비이지만 이건 온라인상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죽음은 슬프다. 하지만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일상의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든다. 잠깐 잊고 우리는 웃는다. 다시 화제의 중심이 슬픔 쪽으로 이끌리고 상대의 동요하는 정서, 촉촉한 눈매가 나에게 스며든다. 나도 한마음이 되어 운다. 그날 감정은 여러 번 출렁였지만, 그래도 최소 2시간 동안은 출렁임이 지속되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둘이 만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평상시의 회복을 49재 이후로 미루었다.

SNS는 아니지만 단톡방 역시 종종 동감을 강요한다. 우리는 무반응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거부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멤버가 소수로 한정된 단톡방에서는 각자가 반응해야 할 몫이 n분의 1로 정해져 있다. 몫도 몫이지만 반응의 속도 역시 중요하다. 매번 뒷북을 칠 순 없기에 답글을 적지만, 만약 침체된 상태라면 쓰는 자아와 나는 분열된다. 이런 분열이 여러 개의 단톡방 사이에서 다시 반복된다. 정서적 교감으로 감당할 수 있는 단톡방이 몇 개인지는 모르나, 최근 제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방이 개설되면 기존 방 하나에서 소리 없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그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리면 감정적 반응과 추측을 짧고 격렬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