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기계에 빼앗긴 노동 그 현실을 直視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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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노조원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회사인가, 노조인가, 아니면 정부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한국인들의 일자리를 모조리 앗아간다는 중국인 때문인가. '일말의 책임'은 이들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노동의 종말(End of Work)'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그 가장 무거운 책임을 '인류의 기술개발'에서 찾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기술과 기계의 일자리 탈취는 진부한 얘기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장 큰 핵심적 의제를 논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리프킨이 말하는 '노동의 종말'은 '재앙적 실업'과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의 털을 사람보다 더 정교하게 깎는 기계는 '농부가 필요 없는 농장'을 가능케 한다.

건설 중장비와 근로자, 자기공명촬영(MRI)장치와 의사, 자동차 조립 라인의 로봇과 숙련공은 노동을 놓고 대립하는 숙명적 라이벌들이다. 그 운명적 대결구도에서 승자는 항상 기술과 기계였으며 인류가 그런 일방적 구도를 깨뜨릴 가능성은 없다는 게 리프킨의 주장이다.

노동의 종말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기술자.관료.전문가를 제외하곤 전 세계 인류 모두가 '영구적 실업자집단'에 포함될 것이라는 암울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청년실업과 노년실업으로 고민하고 있다. 기계에 빼앗긴 '노동의 종말'과 '영구적 실업구조'를 외면한 채 청노년실업의 단초를 논할 수 없다. 기계의 일자리 말살은 노도(怒濤)처럼 밀려들고 있으며 일자리 증발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되는 노사 분규를 왜소한 요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기업인들에겐 중국 노동자.한국 노동자, 그리고 기계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작금의 '중국 러시'는 이 세 가지 대체재(代替財) 가운데 아직까지는 그래도 중국 노동자가 제일 싸다는 결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중국 노동자조차 기계에 일터를 내줘야 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잇따른 노조원 자살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들의 자살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타살'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제반 노동시장 환경을 돌아보면 제2, 제3의 비극적 자살이 끊이지 않을 수 있다는게 문제다.

모두 깊이 반성해야 할 때지만 현실을 무시한 일방적 주장만 일삼아 온 노동운동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다. 노동시장을 잠식해 가는 기계의 외연적(外延的) 현실을 직시하고 기업인들의 '이해타산' 세계로 파고들어가 '냉철하고 현명한 머리 싸움과 계산'을 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꿀보다 먼 장래의 일자리와 실익을 위해 챙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노조는 곰곰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망할 기업에 투자할 사람은 없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상 기업을 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은 자본주들에게 있다. 노조가 그 선택권을 좌지우지할 권리까지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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