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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과일장수 "이런 가격 처음"…사과 176%, 귤 134%↑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신선식품발 고물가 뉴노멀 되나

“작년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너무 올랐네. 조금만 더 깎아주면 안 돼요?”

“여기 다 둘러봐도 이 가격 없어요. 요즘 딸기는 없어서 못 판다니까.”

지난달 30일,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곳곳에서는 설을 앞두고 과일을 구매하려는 고객들이 곳곳에서 가격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매달 이곳 시장을 찾는다는 70대 손님 안모씨는 “사과, 배 등 주스 원물을 사다가 직접 만들어 먹는데 이젠 주스를 끊어야겠다”며 “과일 가격이 가장 싼 데가 가락시장인데, 마트에선 대체 얼마라는 얘기냐”고 불평을 쏟아냈다. 이날 가격 불만이 가장 많았던 품목은 단연 딸기와 사과였다.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 오죽하면 ‘금(金)딸기’ ‘금사과’로 불린다. E상회 사장 손모씨는 “딸기는 지난해 가격보다 절반 이상이 더 올랐다고 보면 된다”며 “올겨울 기습 한파로 하우스 재배에 난방비가 많이 들어가 재배비용 자체가 확 뛰었다”고 설명했다. 선물용 배를 고르던 50대 김주경씨는 “시장에 나온 김에 집에 딸기를 사가려고 했는데 비싸서 그냥 내려놓았다”며 “물가가 많이 내려갔다고 하던데 정작 시장에 나와 보면 계산하기가 무섭다”고 토로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물가 상승의 주범 중 하나였던 원유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월 2%대로 내려왔지만, 소비자가 느끼는 체감 물가는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다. 실생활과 밀접한 농산물 가격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딸기·채소와 같은 소비량이 많은 신선식품 가격이 급등세다. 소비를 줄이는 것 외에는 당장 가격 상승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아 일각에서는 신선식품발(發) 물가 불안이 ‘뉴노멀’(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온다.

2일 통계청이 발표한 ‘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농산물 가격은 지난해 1월보다 15.4% 올랐다. 지난해 12월(15.7%)에 이어 두 달 연속 15%대 상승이다. 신선식품 중에서도 신선 과실이 28.5% 올라 농산물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특히 설을 앞두고 과일류 가격은 말 그대로 폭등세다. 감귤과 배의 도매가격은 지난해 1월보다 각각 134%, 107% 상승했다(2일 서울도매시장 기준). 의정부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이모씨는 “20년 가까이 과일 장사를 해왔지만 이 정도 품질에 이 가격을 받는 건 처음”이라고 전했다.

특히 국제유가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어 최근의 상황을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과일도매업계의 설명이다. 국제유가가 내리면서 농기계나 하우스 난방비, 물류비 등 생산원가는 안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유가와 농산물 가격은 상관관계가 높아 통상적으로 변동률이 함께 움직인다”고 말했다.

국제유가와 농산물 가격이 탈(脫)동조화를 보이는 건 지난해 발생한 폭우나 이상저온 같은 기후변화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2년 전 생산량이 56만톤 수준이었던 사과의 경우 지난해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부진으로 생산량이 30% 이상 줄며 40만톤을 밑돌았다(39만톤). 이동혁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센터장은 “사과는 기상여건과 병충해에 특히 영향을 많이 받는 과일인데, 지난해 4월 냉해와 생육기 탄저병 등으로 인한 피해가 유달리 컸다”며 “지난 30년간의 추이로 봤을 때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는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폭염·폭우에 속절없이 당했던 딸기도 마찬가지다. 경남 사천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이시중 새벽딸기 대표는 “지난해 딸기 생육기였던 7월에 큰 수해가 터졌고, 모종을 심는 9월 말~10월 초에는 이상기온으로 병충해가 많이 늘어났다”며 “모든 농가가 ‘생산량이 이렇게 적은 건 역대급’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임정빈 교수는 “자연재해로 인한 (농산물의) 수급 불안이 잦아지고 있고, 이런 현상이 더 심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농업 생산인구 감소와 인건비 상승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산인구 감소는 곧 생산량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내 농·수산물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224만 명 수준이던 전국 농가인구는 2023년 214만2000명(추정치)으로 5년 새 10만 명 이상 줄었다. 이들 중에서도 49.7%가 65세 이상임을 고려하면 5년 내 농업인구는 200만 명을 밑돌 것이란 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진단이다. 인건비 상승폭도 가파르다. 2018년 10아르(a)당 1만7088원 수준이던 농산물 고용 노동비는 2022년 1만9811원으로 16% 가까이 상승했다.

문제는 이 같은 농산물 생산원가 상승 요인을 당장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농산물발 물가 불안이 고착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창길 대통령소속 농어촌위원회 분과위원장은 “65세 이상 인구가 50%에 육박한 지금 농촌에서는 인건비는 차치하고 일할 사람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며 “특히 사과, 배추 등 손이 많이 가는 노지재배 작물은 스마트팜 같은 기술을 도입하기도 어려워 향후 생산량 감소가 필연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선식품은 특성상 비축량을 확 늘리기도 어렵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지금처럼 기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비축량을 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동혁 센터장은 “기후대응품종을 개발하는 등 생산성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중장기 수급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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