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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2030만 패션이 필요한 건 아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76호 30면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서정민 문화선임기자

지난 1일 ‘2024 F/W 서울패션위크’가 시작됐다. 매년 두 차례 4~5일간 열리는 서울패션위크는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한발 앞서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패션 행사다. 행사 주관을 맡은 서울시는 세계 4대 패션위크(뉴욕·파리·밀라노·런던)에 이어 5대 패션위크로 발돋움 하겠다는 목표로 올해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8개 의류·신발·가방·주얼리 브랜드가 참여한 트레이드쇼 공간을 마련하고 글로벌 백화점 체인 하비 니콜스를 비롯한 23개국 101명의 해외 바이어를 초청해 일대일 수주 상담을 유도했다. 또 글로벌 K팝 스타인 뉴진스를 홍보대사로 선정해 젊은 층의 주목도 끌었다. 매년 서울동대문플라자(DDP)에서만 진행했던 쇼를 성수동 복합문화공간 에스팩토리에서도 일부 진행하면서 젊은이들의 성지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도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2024 F/W 서울패션위크’ 개막
원로 없이, 신진 디자이너만 가득

그런데 업계에선 이번 쇼 리스트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매년 꾸준히 쇼를 열었던 원로들의 브랜드 카루소(장광효)·이상봉·지춘희·빅팍(박윤수) 등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름도 낯선 신생 브랜드들이 절반 넘게 포진했다. 알아보니 이번에 쇼 참가 심사기준이 일부 바뀌었다. ‘해외 매출 실적’을 지난 시즌 10%에서 올해 20%로 올린 게 대표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패션위크가 글로벌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확실히 자리잡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서울패션위크 쇼에 참가하면 억대가 넘는 장소 대관비, 시스템(조명·오디오) 비용, 홍보를 지원받는다. 개인 사정으로 쇼 참가를 고사한 원로 디자이너도 있지만, 결국 이번 서울시 의도는 정량평가에 정성평가까지 더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스트리트 패션을 메인으로 하는 신진 디자이너 위주로 밀어주겠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정부 지원 하나 없이 집 몇 채 값을 투자해 파리·뉴욕에 진출했던 원로들은 억울할 수밖에.

신인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만, 시가 주관하는 서울패션위크의 역할이 과연 비즈니스 활성화에만 있을까 의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 플랫폼이라면 어느 한 세대만을 타깃으로 하기보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패션 축제로 자리잡아야 하지 않을까. 편하고 개성 있는 스트리트 패션도 중요하지만 핏과 실루엣을 잘 살린 테일러드 슈트도 필요하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2030세대 옷만으로 건강한 패션 시장 형성은 어렵다”면서 “유럽의 명품들과 경쟁하면서 지켜온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역사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뿌리 없는 나무는 흔들리기 쉽다”며 “젊은 층 입맛에 맞춰 단기 실적 효과만 보려 하면 서울패션위크의 존재가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 지원사업이라면 응당 긴 미래 비전과 확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늘 시 주요 공무원들의 입맛에 맞춘 단기 목표만을 좇는다”면서 “서울패션위크가 신진 디자이너 창작지원 플랫폼으로 축소되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중견 스타 디자이너들이 서울패션위크에 소극적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공무원 특유의 뒤탈 없는 균등 분배 때문에 가능성 여부를 면밀히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지원금을 투자하는 방식은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서울패션위크는 신인만 좋아하는 경향이 커서 그 역할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게 불만의 이유다.

K패션 글로벌화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글로벌 패션위크 스탠더드에 맞춰 하이패션부터 스트리트 패션까지, 대한민국 다양한 층의 디자인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밀라노패션위크 기간 동안 올해 90세인 원로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패션쇼를 보러 가는 이유는 그가 지난해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탈리아 패션의 전설’이기 때문이다. 전통과 역사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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