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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사색] 숲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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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호 30면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유심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통과시켜 주고도 제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늘과 사귀다』 (랜덤하우스 2007)

나무는 어쩌면 허공을 꼭 끌어안는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니 가지마다 저리도 무성할 테지요. 소리는 매번 바람을 꼭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한 바람결에도 먼 곳의 작은 기척이 실려 오는 것이겠지요. 그런가 하면 눈빛은 늘 빛을 꼭 끌어안습니다. 그러니 환해지는 일이 자주 생기는 것. 세상은 너무나 거대해서 끌어안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저마다 흩어질 것입니다. 힘없고 소리 낼 수 없어 간신히 손만 흔드는 사람들을 미처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면 나를 안아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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