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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석무의 실학산책

“법 적용은 임금의 최측근부터 시작해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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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1784년 다산은 33세로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자 7월 23일 성균관 직강(정5품)에 임명되었다. 상을 당하기 직전 다산은 정조의 지극한 배려로 만인이 바라던 홍문관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친상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상을 마치고 직강 벼슬을 시작으로 공직자가 되자, 임금은 다산을 잊지 못하고 다시 홍문관 교리·수찬 등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홍문관의 학사(學士)가 되어야만 경연에도 참석하며 임금과 국사를 제대로 논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 맡았던 다산
탐관오리 비호하는 조정 맞서
“민생과 국법은 존엄해야” 상소
정조도 의금부에 ‘응분 처벌’명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그해 10월 27일 홍문관 교리(校理)에 제수되고 그다음 날 수찬(修撰)으로 옮겼는데 밤중에 호출을 당해 비밀리에 경기도 암행어사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정5품의 벼슬아치가 임금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으로 탐관오리들을 징치할 권한을 지니게 되었으니 사나이로서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던가. 29일 임명장을 받고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보름 동안 경기도 4개 지역을 염찰하라는 명령이었다. 담당 고을은 적성(현재 파주시)·마전(이북 땅)·연천(연천군)·삭녕(이북 땅) 등 네 고을이고, 양주로 들어가 파주로 나오도록 하였으니 지나는 곳도 염찰하게 되어 있어 실제로는 6개 고을을 염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무렵 전국에는 가뭄이 극심해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탐관오리들은 탐학한 악행을 멈추지 않아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이어서, 임금은 특단의 조치로 10명의 암행어사를 선발하여 경기도를 샅샅이 살펴서 부정부패를 막아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가도록 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금은 암행어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임무를 상세히 기록하여 나눠주고, 그대로 봉행하고 결과를 낱낱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산은 “임명장을 받은 즉시 강촌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음날 길을 떠나…먼저 적성에서 삭녕에 이르기까지 마을 구석구석을 드나들며 천민들 사이에서 신분을 감추고 각별히 염탐하여 확실한 사실을 얻어내서는 혹 출두하여 샅샅이 조사하기도 하고, 혹 자취를 숨기고서 다시 살펴본 다음에 해당 고을 수령의 옳고 그른 일에 대해 소상하게 열거하여 논했고, 지나가는 각 고을의 실태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들어서 논했습니다”라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암행어사 임무를 수행한 기록이었다.

이런 보고서의 핵심 내용에는 두 가지 사항이 들어 있었다. 대체로 현직 목민관들은 무난했으나 연천의 전 현감 김양직과 삭녕의 전 군수 강명길은 문제였다. 한 마디로 이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온갖 불법과 비행을 저질러 목민관이라는 제도가 생긴 이래 들어보지 못했던 탐학한 짓거리만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사람이야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했건만 사정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양직은 궁중의 지관(地官)으로 왕가의 묫자리를 잡아주는 임금의 최측근이었고, 강명길은 의원으로서 임금의 환후를 보살피는 어의로 또한 임금의 최측근 인물이었다.

다산은 암행을 마치고 올린 보고서대로 임금의 조치가 있을 것을 기대했지만, 중간의 고관들이 임금의 최측근은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내리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에 의분심을 이기지 못한 다산은 곧바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그 간악한 두 목민관을 처벌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간다면 민생과 국법에 말할 수 없는 손상이 온다면서 강력한 주장을 폈다.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탐관오리로서 엄연히 법을 범했는데 그대로 놓아두고 죄를 묻지 않으신다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법을 적용할 때는 마땅히 임금의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用法宜自近習始). 신의 생각으로는 이 두 사람을 속히 의금부로 하여금 면밀히 취조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여 민생을 소중하게 여기고 국법을 존엄하게 한다면(以重民生 以尊國法) 못내 다행스럽겠습니다.”(경기어사 복명 뒤의 일을 논한 상소)

‘이중민생 이존국법’ 여덟 글자야말로 다산의 법치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논리였다. 탐관오리들의 탐학이나 부정부패의 발호는 바로 백성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걸 법으로 바로잡는 일이 민생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요 그렇게 법을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해야만 국법이 존엄해진다니 민생과 법이 함께 살아나는 일이다. 정조 임금 역시 훌륭한 임금이었다. 상소문을 읽어본 정조는 자신의 최측근들이었으나 예외 없이 의금부에 명하여 죄상을 밝혀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하였다. 정조와 다산의 위대함, 거기서 법치주의의 진면목이 보이고 백성들이 소중함도 밝혀졌다. 200년 전 조선의 역사는 그러했는데,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정조와 다산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