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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현호의 법과 삶

의료인 형사책임특례는 평등원칙에 반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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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법학박사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법학박사

의료법은 1973년 새로 만들면서 의료인이 음주운전, 사기, 성범죄,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등 일반 형사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 면허취소를 하였으나, 2000년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가 지난해 11월 다시 개정되어 면허취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벌금형부터 의료인 결격사유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고, 독일은 더 나아가 일반 형사범죄자는 물론 “의료업 직무수행 부적격자”에 대해서도 직업금지명령을 내려 의료업을 못 하게 하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주 역시 유죄선고를 받은 경우 면허취소, 정지사유로 규정하고 있고, 미국 의사협회는 자율적으로 의료윤리규정을 제정하여 형사 유죄판결과 상관없이 의료사고, 탈세 등 ‘무능, 부정, 비윤리적 행위’를 한 의사에 대해 회원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몇 년 전 지방에서 수면 마취 하에 내시경 검사를 하면서 여성 여러 명을 성폭행한 의사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의사면허가 살아있는 상태여서 만기출소한 후 곧바로 개업하여 사회적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지역 환자들은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가 성폭행 전과가 있는지 모르고 수면 내시경 검사를 받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으나 달리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주요국, 의료인 범법에 엄격
일반 직업인도 사회적 책임 져
법은 국민 모두에게 평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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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자료에 의하면 2018년부터 2022년 사이 5년간 강간, 강제추행, 불법촬영, 통신매체 이용 음란행위 등 성범죄를 저질러 검거된 의료인은 793명에 이르나 이들 중 실형을 선고 받아도 면허를 취소할 수 없었다. 최소한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들어 면허정지처분이라도 되어야 하지만 형사처벌결과를 기다리다 징계시효를 놓쳐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국가가 면허를 부여한 변호사, 공인회계사, 변리사, 법무사, 공인중개사 등 거의 모든 전문직은 물론 국가공무원, 교사, 공공기관 임직원 등 조차도 일반 형사범죄로 처벌받는 경우 범죄의 종류를 불문하고 면허취소, 정지 처분을 받는다. 유독 의료인만이 유일하게 면책되어 왔다. 의료인은 성직자, 변호사와 함께 대표적 3대 전문직이다. 전문직은 가장 많은 교육을 받고, 비교적 높은 소득과 신분이 보장되고, 공익적이고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다른 직업인에 비하여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진다. 특히 의료인은 생명을 독점적으로 다루는 진료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경을 받고 그만큼 윤리적, 법적 책임 역시 더 무겁게 져야 한다.

국가는 전문직의 자질과 윤리성을 보증하고 관리하여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여야 할 헌법적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보건복지부는 법이 재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를 만들어 의료인에 대한 의료사고 형사처벌 면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응급의료, 중중외상, 흉부외과, 산과 등 필수의료 분야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져 교통사고처리특례법처럼 종합보험에 가입하거나 환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로 다시 개정하여야 필수의료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든다. 필수의료인력확보는 의료인 대량양성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은 전 국민이 보편적으로 특례대상이 되는 법률인데 반하여 의료인 형사특례법은 일방적으로 의료인에게만 혜택이 가는 불공정법이어서 비교대상이 아니다.

형사범죄에 대하여 특정 직업에 예외를 두게 되면 결국 모든 직업에서 특례를 주장하게 되어 국가 공권력을 무력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급성장한 동력은 토목, 건설, 선박, 자동차, 전자산업을 일으킨 안전관리자, 기술자들 덕분이다. 그런데 이들은 산업재해보험, 근로자재해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산업안전보건법 이외에 중대재해처벌법을 추가로 제정하여 가중처벌하고 있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국가로부터 면허를 부여받지 않은 직업인에게도 엄격한 사회적 책임을 지우는데 의료인에 대해 형사특례를 인정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

최소한 의료인 형사특례를 주려면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처럼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과실을 추정하고 의료인에게 무과실 입증책임을 부담시켜 환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혹시 보건복지부가 의대정원 증대에 대한 반대급부로 의료인 형사특례로 타협하려는 행정편의주의적 의도라면 이는 국민의 생명권과 맞바꾸는 위험한 태도이다. 생명은 보호 대상이지 양보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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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대표변호사·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