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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사이트" 발언이 명예훼손? 대법 "의견표명일 뿐" 파기환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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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직 당시 각종 정치공작을 벌인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재직 당시 각종 정치공작을 벌인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국가정보원 대변인이 친야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를 두고 “종북세력이 활동할 가능성이 많다”고 언급했다고 해서 커뮤니티 운영자의 명예를 훼손한 게 아니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는 지난 4일 ‘오늘의 유머’ 온라인 커뮤니티 운영자 이모씨가 “국정원 측의 ‘종북 사이트’ 발언으로 내 명예가 훼손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국정원은 2009년부터 2012년 12월 대선 직전까지 오늘의 유머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달거나, 게시글에 추천 또는 비공감을 누르는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특히 국정원은 오늘의 유머를 진보 성향 커뮤니티로 분류하고 여론 조작 활동의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이 사건이 2012년 대선 당시 민주당 의원들의 ‘댓글 공작 의혹’ 제기로 처음 불거진 직후, 당시 국정원 대변인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종북사이트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만 (오유가) 종북세력이나 북한과 연계된 인물들이 활동할 가능성이 많이 있는 공간으로 본다”는 해명을 내놨다. “국내 종북세력 척결이 우리 업무에 들어가 있다”며 위법하지 않다는 취지에서였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정보원 여직원 김모씨가 2012년 12월 13일 경찰에 임의제출 형식으로 컴퓨터 본체와 노트북 등을 제출했다.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김씨의 오피스텔에서 경찰과 국정원, 선관위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김씨의 변호인에게 출석요구서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가정보원 여직원 김모씨가 2012년 12월 13일 경찰에 임의제출 형식으로 컴퓨터 본체와 노트북 등을 제출했다.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김씨의 오피스텔에서 경찰과 국정원, 선관위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김씨의 변호인에게 출석요구서를 전달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정원의 댓글 공작을 지시한 혐의로 2013년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2018년 징역 4년을 확정받았다. 이씨는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5년 “국정원 대변인의 ‘종북’ 발언은 명예훼손’”이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오늘의 유머가 ‘종북 사이트’라는 오명을 썼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이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2심은 ‘명예훼손이 맞다’며 국가 측에 위자료 1000만원 배상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국정원 댓글 조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질 무렵이라 일반인은 대공 업무를 관장하는 국가기관 대변인의 종북 관련 발언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남북 분단 사회에서 ‘종북’이란 표현이 낳는 부정적 인상을 고려하면 A씨가 다년간 사이트 운영 등을 통해 쌓아 올린 명성이 침해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 발언으로) 원고에 대한 객관적 평판이나 명성이 손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종북’이라는 표현이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어 시대적·정치적 상황 혹은 관점에 따라 의미가 유동적이고, 표현의 상대방이 된 사람의 인식 내용 역시 가변적”이라며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은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기보다는 해당 사이트에 관한 광의의 정치적 평가 내지 의견표명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봤다. 또 “설령 이 사건 종북 관련 발언이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더라도, 이 사건 사이트의 이용자 중 일부가 종북세력이나 북한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에 불과하여 그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이 이 사건 사이트의 운영자인 원고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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