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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돈 1000억, 벌금 20억”…산업스파이, 걸려도 ‘남는 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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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 ‘3대 초격차 기술’을 중국에 빼돌려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범죄수익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 유출 범죄는 혐의 입증이 어렵고, 처벌 역시 솜방망이에 그치는 데다 범죄수익 추징조차 제대로 안 돼 구조적으로 산업스파이를 뿌리 뽑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의 반도체 세정장비 기술 유출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원지검은 2022년 5월과 지난해 1월 세메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 핵심 도면과 별도 ‘습식 세정장비’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전직 연구원 남모씨 등을 기소하면서 남씨와 남씨 업체 S사에 대해 584억원을 추징보전했다. 추징보전은 확정판결 전 재산처분을 금지하고 동결하는 조치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남씨와 S사의 혐의를 인정해 합계 징역 9년형과 벌금 10억원을 선고하면서도 범죄수익 환수를 위한 몰수·추징 선고는 하지 않았다. 지난 9일 항소심 역시 징역 9→10년, 벌금 15억→20억원으로 상향하면서도 추징금을 선고하지 않았다.

검찰에선 이 같은 선고 직후 “징역 10년을 살고 나와도 S사가 장비 수출로 벌어들인 1000억원은 고스란히 남는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한 부장검사는 “기술 유출은 구체적인 피해액 추산이 어려워 추징도 난맥상”이라며 “구간별 몰수 규정 등이 담긴 특별법 신설이 필요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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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대검찰청 용역보고서 ‘기술유출 피해 금액 산정 등에 관한 연구’를 집필한 전우정 KAIST 교수는 “공개된 기술인 ‘특허’와 달리 ‘영업비밀’은 기업이 법원에서도 공개를 꺼리는 특성상 피해액 추산이 더욱 어렵다”며 “여기에 해외 법인을 상대로 민·형사상 구제를 받기란 외교상 문제부터 입증의 어려움까지 현실적 한계가 크다”고 분석했다.

그사이 중국은 ‘산업스파이’를 활용해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지난달 대통령 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해외 기술 유출은 92건으로 반도체 24건, 디스플레이 20건, 2차전지 7건 순이었다.

지난 3일 서울중앙지검이 반도체 증착장비 관련 영업비밀을 중국에 넘긴 혐의로 구속기소한 김모 삼성전자 전 부장과 협력사 직원 방모씨가 대표적 사례다.

검찰 등에 따르면 이들은 2022년 2~3월 중국 회사의 개발 제안을 수락하고 협력사 사무실에서 설계도면 1120장을 출력해 자동차에 싣고 반출하거나 중국 업체의 서버나 위챗 등에 영업비밀 600쪽 이상을 올리는 식으로 핵심 기술을 빼돌렸다.

국내 반도체업계의 전설로 꼽히는 최모(56)씨가 중국에 ‘삼성전자 복제공장’을 지으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다. 최씨는 18년간 근무한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퇴직한 뒤 하이닉스반도체 부사장까지 지냈지만, 대만 폭스콘의 ‘8조원을 투자할 테니 중국에 20나노급 D램 반도체 생산공장을 지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폭스콘의 제안은 최종 무산됐지만, 수원지검은 국내 반도체 핵심인력 200여 명을 영입하고 삼성전자 시안공장 설계도면 등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해 6월 최씨를 구속기소했다. 하지만 최씨는 5개월 뒤 법원에 보증금 5000만원을 내고 보석됐다.

검찰 관계자는 “결국 사람의 욕심으로 벌어지는 범죄인 만큼 범죄 유인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실상 ‘징역이 남는 장사’라는 인식을 고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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