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선 모든 게 비밀이었어요. 고속도로 갓길에 숨어있던 탈북민 가족을 차에 태워 국경 근방 은신처로 이동했죠. 현지 브로커들한테 끌려 나오듯 내리니 깜깜한 밀림 한가운데였어요. 하루 넘게 산길을 걸었습니다. 카메라에 담느라 풀린 신발 끈 맬 겨를도 없었죠.”
탈북민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31일 개봉)의 김현석(47) 촬영감독은 2019년 탈북민 노씨 일가족의 탈북 경로를 동행 취재한 상황을 돌이키며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두 가족의 목숨 건 여정을 통해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수미 테리 박사 등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콩고 여성 인권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다큐 ‘기쁨의 도시’(2018)를 만든 매들린 개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다큐 촬영을 위해 사선을 넘나든 김 감독을 지난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탈북 경로까지 동행할 줄 몰랐지만, 위험한 현장이라 촬영감독으로서 오히려 더 끌렸다”고 말했다.
23년 간 1000명 이상의 탈북자를 도운 김성은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두 가족이 다큐의 중심이다. 두 번째 탈북 시도로 남한에 정착한 북한군 출신 이소연씨는 브로커를 통해 북에 두고 온 아들을 탈출시키려 한다. 노영길·우영복씨 부부는 80대 노모, 어린 두 딸까지 둘러 업고 온 가족이 탈북 길에 오른다. 두만강 국경을 넘어 중국·베트남·라오스·태국 정글을 헤치고 한국에 이르는 1만2000㎞ 탈출 경로가 북한 주민, 제작진이 직접 찍은 영상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백인 감독 대신 김 감독이 최대원 공동 프로듀서, 김 목사와 함께 현지에 파견됐다.
- 탈북 경로는 어디서부터 동행했나.
- “노씨 가족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넘어온 이후부터 라오스까지다. 중국 부분은 그들이 직접 핸드폰으로 찍었다.”
- 위험했던 순간은.
- “베트남 브로커가 빠른 속도로 앞서 가는데, 길도 없는 산에서 따라잡기 쉽지 않더라. 12시간 걸려 노씨 가족을 라오스 국경에 데려다 준 뒤, 우리는 정식 출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 13시간을 더 걸어 베트남 출발지로 돌아와야 했다.”
라오스에서 노씨 가족과 재회했을 땐 서로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고 김 감독은 말했다. 정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그는 “아들을 못 데려온 이소연씨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경으로 다큐에 계속 출연하기로 했을 땐 그 안타까운 마음이 헤아려져 힘들었다. 촬영 분량 확보를 고민했던 게 미안해졌다”고 말했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지난해 11월 미국 개봉 후 미 국무부가 특별 상영회를 열고, 지난 9일 공영방송 PBS가 미국 전역에 방영하는 등 북한 인권 현실을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먹은 건 없는데 인분을 비료로 바쳐야 하는 탓에 남의 똥을 훔치고, 굶어 죽은 시신이 강에 떠다니는 참상이 다큐에서 그려진다.
지난 19일 서울 용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비욘드 유토피아’ 시사회에서 이소연씨는 “한국에 정착해 자유와 행복이란 걸 알았다. 24시간 따뜻한 물과 전기가 나오고 배 고프지 않은 것”이라며 “아들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면 북한 정부가 (아들을) 죽이진 못할 것 같다는 희망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