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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골’ 쇼팽의 세밀한 울림, 지친 가슴 은밀하게 파고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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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호 23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1849년쯤의 쇼팽. [사진 사회평론]

1849년쯤의 쇼팽. [사진 사회평론]

요즘 클래식 공연계에는 특정 작곡가의 한 장르 전곡을 한꺼번에 연주하는 이른바 ‘마라톤 연주’가 인기다. 하나만 연주하기도 어려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같은 고난도의 곡 5개를 몇 시간에 걸쳐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일이니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을 해내는 음악가의 연주력과 집중력도 놀랍지만 그 체력에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음악가들은 체력이 약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음악가에게 체력은 운동선수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곡가도 마찬가지이다. 곡을 쓰려면 강한 멘탈과 체력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대표적인 음악가가 바로 쇼팽이다. 그는 뛰어난 테크닉과 표현력을 갖추었지만 강한 터치로 연주를 할 힘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자신이 작곡한 폴로네즈를 치다가 피아노의 현을 끊어뜨린 제자를 그토록 부러워했을까. 쇼팽은 몸만 약한 게 아니라 심약하기까지 해서 무대 공포증도 있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들 앞에서만 연주할 수밖에. 다행히 상류층 엘리트들 사이에 문예 살롱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쇼팽의 놀랍도록 섬세하고 심오한 울림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팬이 적지 않았다.

피 토하고 설사 시달리다 38세 숨져

마리아 보진스카. [사진 사회평론]

마리아 보진스카. [사진 사회평론]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긴 했어도 인복은 많아서 쇼팽의 주변에는 그를 아끼고 챙겨주는 사람이 넘쳤다. 부모는 물론이고 하나뿐인 누이도 병약하고 예민한 쇼팽을 배려하고 사랑해 주었다. 그가 다녔던 명문학교 리세움의 친구들도 나약한 쇼팽을 따돌리기는커녕 쇼팽의 음악적 재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보호해 주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에게 어린 천재 쇼팽은 나라의 희망이자 자긍심이었다. 쇼팽이 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던 날 받았던 뜨거운 지지와 성대한 환송은 마치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출정식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친구들 덕분에 쇼팽은 조국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했고, 혁명이 실패한 후 러시아 정부가 벌였던 보복조치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망명자 신세까지 면하지는 못했고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안전을 보장받기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고국인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 있던 폴란드의 지식인과 귀족들이 그의 정착을 도왔으며, 쇼팽은 빼어난 피아노 실력뿐 아니라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와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를 갖춘 덕분에 몇 달 만에 파리 문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파리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늘 외롭고 고독했다. 쇼팽에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국에 대한 향수는 커졌다. 죽마고우인 안토니 보진스키와의 재회는 그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기쁨이었고, 안토니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와 바로 연인 관계가 된다. 하지만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쇼팽은 심하게 감기를 앓았는데, 얼마나 증상이 심했던지 바르샤바 신문에 쇼팽의 사망기사가 실렸다가 취소될 정도였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병약한 청년을 사위로 삼고 싶은 부모는 없는 법. 쇼팽은 마리아의 어머니로부터 파혼 통보를 받는다.

조르주 상드. [사진 사회평론]

조르주 상드. [사진 사회평론]

파혼을 당한 쇼팽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실연의 상처는 쇼팽에게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도록 해주었다. 바로 파리 최고 화제의 여성인 조르주 상드였다. 그녀는 당시 빅토르 위고보다 더 인기가 많았던 작가였다. 불륜과 자살 같은 자극적 소재와 선정적이고 대담한 표현이 가득한 그녀의 소설은 발표하는 대로 팔려나갔고, 자유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다.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워대면서도 박식하고 당당한 태도는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여섯 살 연상의 상드가 실연으로 인한 쇼팽의 절망을 보듬어주고 쇼팽도 상드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들게 되면서,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았던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쇼팽에 대한 상드의 애정은 놀라워서 쇠약해진 쇼팽의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해 엄청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사가 쇼팽에게 휴양을 권하자 상드는 그를 데리고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까지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섬에 도착하자마자 쇼팽이 기침을 시작했고 급기야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휴양이 끔직한 유배 생활이 된 것이다. 쇼팽은 자주 열이 났고 피를 토했으며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창작열이 식지 않아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으니 위대한 인물들은 역시 뭔가 다르다. 이때 작곡된 곡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24개의 프렐류드다.

여행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온 상드는 자신이 상속받은 저택이 있는 프랑스의 중부 평원에 위치한 노앙으로 쇼팽을 데리고 왔다. 상드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시골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 쇼팽은 생기를 되찾았고, 상드는 쇼팽에게 플레엘 피아노를 구해주었다. 쇼팽의 열 손가락을 타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떠오르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기면 주옥같은 작품이 되었다. 유명한 ‘발라드 3번’과 ‘발라드 4번’ ‘녹턴 c단조’ ‘환상곡 f단조’ ‘폴로네즈 A♭장조’ ‘스케르초 E장조’가 모두 이 때 만들어졌다. 한편 상드는 쇼팽이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파리에서 열렸던 대규모 연주회에서 상드의 응원 속에 쇼팽은 마침내 무대의 부담을 이겨내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도 끝은 있는 법이다. 수년 간 쇼팽에게 헌신적이었던 상드의 사랑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성격 차이가 너무 컸다. 쇼팽은 몸도 약할 뿐 아니라 모든 것에 예민하고 까다로웠고, 상드는 매사에 대범하고 자기 주도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너무 달라서 끌렸고 그렇기에 서로를 참기 힘들었다. 쇼팽은 상드가 자기를 남자로 존중하지 않고 어린 아이나 병자 취급 한다고 불만이었고, 상드는 쇼팽이 이유 없이 질투를 하고 토라져서 말을 안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웠다. 결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상드와의 이별은 심신이 연약한 쇼팽에게 치명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 모든 음악 활동이 중단되고 레슨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먹고 사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다. 심한 신경통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쇼팽을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자 제인 스털링의 런던 초청에 그가 선뜻 응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런던의 춥고 습한 날씨와 탁한 스모그가 쇼팽의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드라마틱하게 압도하려하지 않고 조근조근 속삭이는 피아니스트가 낯설었던 런던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심리적, 경제적 어려움은 쇼팽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곡 없지만 소품 200곡 넘게 작곡

쇼팽의 심장이 보관된 홀리크로스교회의 비문. [사진 사회평론]

쇼팽의 심장이 보관된 홀리크로스교회의 비문. [사진 사회평론]

7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을 때 쇼팽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심하게 피를 토했고 고질적인 설사에 시달렸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햇빛이 잘 들고 난방이 잘되는 방돔 광장의 새 아파트로 이사했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쇼팽의 나이 고작 38세였다. 평생 한 번도 젊음의 활력을 누려보지 못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쇼팽은 자기에게 허락된 것만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리는 법을 알았다. 격렬함이 부족한 부분은 섬세함으로 채웠고, 에너지가 모자란 것은 정교함으로 메꿨다. 대편성의 긴 곡을 감당할만한 체력이 없어서 대곡은 거의 쓰지 못했지만 작은 소품은 200곡도 넘게 작곡했다. 해머로 때려서 현을 진동시키는 피아노를 남들처럼 큰 힘으로 칠 수 없으니, 피아노를 바이올린이나 클라리넷 같은 악기처럼 레가토로 노래하게 만들었다.

약육강식의 시대다.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한다. 이 세상은 강하고 큰 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에 목마르다. 쇼팽은 바로 그 세밀한 소리로 우리를 매혹한다. 그의 곡에서는 조심스럽고 은밀하며 애정 어린 낮은 속삭임이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하이네는 쇼팽을 피아노로 영혼을 치유하는 천사라고 했다. 그는 몸이 약했던 만큼 예민했고 체력이 부족했던 만큼 정교했으며, 인생이 힘들었던 만큼 소리의 울림을 민감하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지문이 선명하다. 우리가 쇼팽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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