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김정은의 민족·통일 부정 배경과 향후 선택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에서 대남 노선의 근본적 변화 방침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을 더 이상 동포가 아닌 주적이자 제1 적대국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중흥의 길, 통일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김정은은 북한 헌법에서 통일 개념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지시했고, 북한은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사진)을 철거했다.

북한의 대남 관계 재평가는 세밀하게 계산된 전략적 변화다. 김정은의 말을 빌리자면 “쓰라린 북남 관계사가 주는 최종 결론”이다. 북한 매체가 노동당 전원회의를 “역사적인 회의였다”고 보도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남북한 데탕트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대북 정책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남북통일을 향한 끈질긴 노력과 통 큰 대북 정책 때문에 남북통일이 가망 없는 일임을 북한이 느끼게 했을 수 있다.

대남 관계 재평가는 계산된 전략
트럼프 집권 후 관계 개선 노림수
폭력적 도발 가능성은 더 높아져

에버라드 칼럼

에버라드 칼럼

통일을 간절히 원했던 북한 주민은 이번 발표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통일이 실현돼 삶이 나아지길 원했던 주민들은 김정은의 발표로 그 꿈이 산산이 부서졌고, 이는 김정은의 국내 지지 기반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지난 15일 김정은의 발표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이번 대남 노선 변화는 북한의 포괄적인 대외 정책 재조정 과정의 일환이다. 이제 북한의 대외 관계에서 최우선 순위는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 발전이다.

김정은은 북·중 관계에다 북·러 밀착, 그리고 북한의 무기 고도화에 힘입어 김정은은 아마도 대외 안보 면에서 자신감을 확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발언을 통해 김정은이 북한 경제에 대해 얼마나 큰 걱정을 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김정은은 “인민의 소박한 생활상 요구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경제 정책이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북·중 및 북·러 교역 증가에도 북한이 생존하려면 광범위한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공급할 수 있는 탄약 재고가 바닥나면 러시아는 곡물과 석유 공급을 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조 필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중국의 원조 증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대남 노선 변경으로 한국의 원조 가능성도 없어졌다.

김정은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북한의 대남 노선 변경이 남한의 경제 지원을 얻어 낼 목적에서 핵무기 사용을 위한 사전 조치일 수도 있다는 것은 우려스럽다. 같은 민족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곤란할 수 있는데 한국을 주적으로 명시함으로써 김정은은 그 장애물을 제거했다.

김정은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다. 그는 바이든 정부와 대화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 김정은이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지 않을까. 지난 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지진 위로 서한을 보낸 김정은이 1965년 한·일 관계 정상화 때처럼 일본의 재정 지원을 희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김정은의 강경한 언사 이면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숨어있을 수 있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혹시 김정은이 통일이 아닌 ‘두 개의 국가 해법’을 개발해 공식적인 남북한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 솔루션에 합의한다면 엄청난 규모의 원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김정은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도 이 같은 상황이 가능하다고 희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북한의 향후 행보를 결정지을 여러 요인이 있다. 미국 대선 결과와 북한 경제 문제가 정치적 영향을 줄 것이다. 김정은의 건강,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딸 김주애(11)에게 더 빨리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올해 북한의 폭력적 도발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는 한국의 대응을 시험대에 올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긴장이 격화하고 미국·일본 또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일종의 뇌물 형태로 긴장을 완화하려 할 것이다. 올해는 격동의 한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김정은이 폭력 아닌 평화를 선택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