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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제원의 시선

클린스만의 무작전 방임 축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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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문화스포츠 디렉터

정제원 문화스포츠 디렉터

“잘 들어. 지금 우리 팀이 안 되는 게 딱 두 가지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바로 ‘디펜스’하고 ‘오펜스’야.”

국내 스포츠계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대학농구가 인기를 구가하던 1970~80년대 고려대 박한 감독이 경기 도중 선수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작전 지시를 했다는 내용이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그런데 이 내용의 진위와 상관없이 박한 감독이 이끌던 당시 고려대 농구부는 승승장구했다. 어떻게 보면 박한 감독의 ‘허허실실 리더십’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 듯싶다.

축구대표팀 감독, 지도력 논란
히딩크의 ‘밀당 리더십’ 배울 만
최선 다했을 때만 즐길 수 있어
25일 말레이시아전 승리 기대

아시안컵에 출전한 축구대표팀을 이끄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바라보다 문득 박한 감독의 리더십이 떠올랐다. 종목은 다르지만 박한과 클린스만의 스타일은 비슷하다. 세세한 작전 지시나 선수 관리는 코치에게 맡긴다. 허술한 듯하지만, 선수들을 믿고 큰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클린스만은 왠지 불안하다. 감독이 선수와 혼연일체가 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라운드에서도, 기자회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20일 요르단과의 2차전을 보자. 한국은 1-2로 끌려가다 경기 막판 상대 선수의 자책골로 동점을 이뤘다. 약체로 꼽히는 요르단을 만나 질 뻔하다가 간신히 비겼다. 축구 팬들은 대표팀의 무기력한 경기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데 팬들의 분노가 절정으로 치닫는 그 순간, 클린스만은 요르단 감독과 하프라인 근처에서 만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꼭 잡고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2-2 무승부라는 결과를 놓고 서로 ‘잘했다’고 덕담이라도 나눈 걸까. 주장 손흥민이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말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것과는 대조적이다.

공격수 조규성의 처신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이 64년 만에 우승에 도전하는 아시안컵을 앞두고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비난을 자초했다.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한껏 멋을 낸 그가 수차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자 팬들은 “머리 깎고 정신 차려라”며 집중포화를 퍼붓는다.

이게 바로 축구다. 축구는 국민의 관심사이자, 전 세계의 공통 언어다. 1차전에서 이강인이 2골을 넣자 다음날 파리생제르맹 팬들이 환호했다. 그만큼 ‘휘발력’이 강하고 ‘폭발력’이 무섭다.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온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게 바로 축구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던 조규성이 이번 대회에선 ‘역적’으로 전락한 모양새다. 클린스만 감독과 조규성의 태도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국민의 눈높이와는 큰 차이가 있다.

뜨거웠던 2002년 여름을 다시 불러낼 수밖에 없다. 한·일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투혼, 거스 히딩크 감독의 어퍼컷 세리머니가 눈에 선하다. 히딩크는 최근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해서 특유의 입담을 뽐냈다. 2002년 당시 코치였던 박항서 전 베트남 대표팀 감독은 22년 만에 히딩크 감독을 만나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히딩크도 박항서 코치와 안정환의 뺨에 뽀뽀를 하면서 애정을 한껏 드러냈다. 누군가 “안정환의 헤딩골이 운 좋게 빗맞아서 들어간 것 아니냐”고 묻자 히딩크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완벽한 헤딩골(퍼펙트 헤더)”이라며 선수를 감쌌다. 감독과 선수의 이야기, 그들의 진한 스킨십을 확인하면서 팬들은 2002년의 팀워크, 요즘 말로 케미를 다시 한번 느낀다. 야생마 같은 선수를 말 한마디로 길들이는 히딩크의 ‘밀당(밀고 당기기)’ 리더십은 여전히 찬탄의 대상이다.

한국대표팀은 25일 말레이시아와 3차전을 벌인다.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해도 강팀과의 대결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한마디로 첩첩산중이다. 믿을 건 상대 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철저한 준비다. 그런데 1, 2차전만 놓고 보면 과연 우리 대표팀이 준비를 제대로 한 건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정도면 ‘무작전 방임 축구’에 가깝다.

히딩크 감독과 안정환의 만남을 바라보는 팬들의 뇌리엔 클린스만 감독과 조규성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팬들은 클린스만 감독이 국민과 함께 울고 웃어주길 바란다. 안정환이 실축한 뒤 죽어라 뛴 결과 헤딩골을 터뜨렸던 것처럼 조규성도 최선을 다해서 만회 골을 터뜨려 주길 바란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선수들에게 “경기를 즐기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경기를 즐기는 건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걸. 최선을 다하지 않고 즐기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국가대표인가.